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목적성



  요즘 무언가를 읽어야할 목적성이 있다. 그래서 뭘 읽을 때마다 흥미가 안 생긴다.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내가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글을 어떻게 인용하고 써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 같아서 그렇다. 그러면 글을 읽는 행위가 순수하지 않고, 도구적인 것만 같아서 읽기가 아예 싫어진다. 그렇다고 목적성이 없이 읽는다고 잘 읽히는 건 아니다. "구체적인 필요가 없을 때"는 "구체적인 필요가 없어서" 안 읽거나, 그저 글자만 휘리릭 지나갈 뿐이다. 구체적이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대의성이나, 막막하기만 했던 야망에 취해 느닷없이 무언가를 몰입해서 읽었던 과거만을 추억할 뿐이다. 



  예전에는 수능만 잘보면 되었다. 그런데 요새는 수능이 쉬워졌다고 한다. 꾸준히 정부는 수시나 입학 사정관제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도입해왔다. 최근에 어떤 수험생으로 부터 대학 입학 면접 문제라며 해설을 질문받은 적이 있다. 아노미 현상이나, 사회계약에 관한 질문이었다. 단지 개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학부 졸업생들에게 물어도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 싶을 만한, 매우 구체적이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뭐 한낱 고등학생 수준에게 이런 걸 질문해도 되나 싶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소위 SKY라고 불리우는 학교도 아니고, 서울권에 있는 중위권 정도 되는 학교의 질문이었다. 


  과거에는 수능시험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많았던 것 같다.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시험 한 방에 대학이 결정된다는 사실이 사교육을 방조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며, 창의적이고 열린 학습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꾸준히 수시의 비중을 높이고, 수능시험의 난이도를 쉽게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논술이나 면접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다양한 학외활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뭐 그렇다고 수능의 비중이 크게 낮아진 것 같지도 않다. 수험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수시에 합격해도 사실 상 수능성적등급이 상위권에 있어야 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대기업 공채를 비롯한 취업시장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업들은 다양한 학외활동들을 강조한다. 봉사활동도 해야되고, 인턴도 해야되고, 동아리도 해야되고, 회장 같은 것도 해봐야 한다. 뭐 그렇다고 학점이나 영어점수가 없어도 되는 건 아니다. 학점도 적당히 좋아야 하고, 영어점수도 적당히 좋아야하고, 자격증도 적당히 있어야 한다. 


  대학 입시나 취업 시장이나 똑같은 것 같다.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경험"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점수" 또한 강조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겉으로 보기에는 변해가는 제도들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갖춰가는 것 처럼 보여 좋기도하지만, 어차피 그 다양성이라는 것 또한 정량적 순위매기기의 연장일 뿐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험생들과 취준생들은 똑같이 푸념한다. "다양성"같은 건 잘해야 하는 가지수가 더 늘어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순위싸움이다.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점수도 높아야 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해야되고, 학외 단체 혹은 학내 단체의 중요한 자리도 가져야되고, 수상경력도 있어야된다. 외국어고등학교나 해외연수 경력이 있으면 더 좋다. 그렇게 어렵게 서류를 통과하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써야하고, 정확하고 깔끔한 말하기 능력도 갖춰야한다. 취준생에게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필수다. 


  말해놓고 보니 너무 과한 이야기가 아닌가도 싶다. 어차피 저거 다 잘하는게 아니더라도 합격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한 가지를 특출나게 잘하면, 다른 것들이 용서되기도 한다. 항목의 다양성을 늘린다는 게 마냥 미국을 따라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부정적인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 저런 과중한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입시나 취직이나 시험 한 종류 혹은 두 종류로 통일하면 어떨까? 그럼 또다시 비난이 빗발칠것이다. 마치 현 시점의 국정교과서 논란 처럼 말이다. 또 가짓수가 줄어든다고, 수험생이나 취준생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투자하는 절대시간은 어차피 늘어나지 절대 줄어들진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의 시작은 다른 차원에 있을 것 같다. 


  뭐 대략 경쟁이 심해서가 아닐까? 뭐 경쟁이란 게 지금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있었을 거고, 미래에도 있을 거다. 어떤 시험에서 경쟁이라는 게 없어지면 그건 시험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이 "너무" 심한 가? 조금 심해보이긴 하다. SKY 대학교의 학교 입학정원을 모두 합쳐봤자, 전 수험생의 1%도 안된다. 허수를 뺀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꽤나 많은 학생들이 SKY라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있다. 취직시장도 비슷한 처지다. 몇 몇 대기업의 공채 숫자는 대학졸업생이나 유예생이나 졸업예정자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그런데 대다수의 취준생들은 대기업 취직을 꿈꾼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난다면, 당연히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죽도록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전체 사회의 거시적 담론으로 생각해본다면, 정말 뻘짓이다. 수험생, 취준생들의 허망한 야망을 탓해야할지,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 공채 인력을 늘리지 않는 대기업과 대학교들을 탓해야할지, 아니면 그냥 정부가 잘못이라고 탓하면 되는 건지. 멜서스가 말한대로 그냥 전쟁이나 전염병이 나서 깨끗하게 인구가 줄면 문제가 다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뭐 어쨌건, 다 잘하면 된다. 무언가 되기 위해서, 입시를 거쳐, 취직을 거쳐, 치킨집을 거쳐, 편안한 노후까지. 어쨌건 그냥 다 잘하면 될 것 같다. 어차피 너무 편안하게 해주면,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책을 읽지 않는 나 처럼 아무것도 안할거다. 그래서 대충 읽게 될지언정 가시적인 목적성이라도 주면 되지 않겠는가. 안읽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취업준비를 하는 대학생들, 그 대학생들이 되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들이 준비하는 다양성이라는게 어차피 경쟁에 떠밀려, 과목의 확장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다. "입학"을 위해, "취직"을 위해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마치 내가 억지로 읽는 것처럼 의미가 결여된 행동일 뿐일게 아닐까 겁이난다. 마치 목표 할당량이 정해진 공장의 노동자들처럼 기계적으로 양을 채울 뿐이다. 그러한 목표의 할당량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양을 정해주길 바랄뿐이다. 어떤 종목, 어떤 과목이 나오든 어차피 등수 싸움이다. 100점까지 채우면 된다.  그게 박정희 대통령이든 박근혜 대통령이든, 전두환 대통령이든, 노무현 대통령이든, 하여간 대통령이든 누구든 양을 정해주길 바란다. 전과목 100점까지만 채우면 된다. 뭐 이런 것도 일종의 아노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참 정부가 하는 일이 힘들 것 같기도 하다. 



  가시적 목적성에 이끌려 책을 살피다 순수성 타령하며 집어 던지고 뻘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에게 어울리는 건 그저 참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딱지 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