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저녁이었다. 머리 복잡한 일을 떠올리며, 담배를 한갑 샀다. 그리도 안피우려고 했건만. 담배와 함께 립톤을 한 캔 사들고 무기력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어폰에는 비틀즈의 "Something"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룩진 삶을 개선해보려던 계획이 다시금 빗나갔다. 적어도 5년은 헤메고 있던 늪에서 조금은 벗어나보려고 그리도 애썼건만, 이제는 그 늪이 내가 원래 속한 세상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력은 조용한 곳으로 나의 거쳐를 옮기는데 쓰자고 결심했다. 우울할 것 까진 없었지만, 슬펐다.
그렇게 궁상맞은 감상에 젖어 쳐벅 쳐벅 집을 향해 걸을 때였다. 자신의 키보다는 훨씬 클 법한 거대한 무지개 우산을 들고 있던 꼬마가 내쪽을 보며 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내게 말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거니하며 지나쳐 가려했다. 그런데 그 꼬마는 팔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비틀즈의 노래는 내 귀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녀석에게 "무슨일이니?"하고 물었다.
노란색 민소매 티셔츠에 빡빡머리를 한 그 꼬마는 거칠고 웅얼거렸다. 내가 알아들은 부분은 한 문장이었다. "형 나 좀 데려다 주면 안되요?". 녀석은 다시 거대한 무지개 우산을 접어 정리하려 애쓰면서 내게 웅얼거렸다. 내가 알아들은 부분은 대략 "비가 왔다.", "엄마가 안나왔다."정도였다. "집이 어디니"라고 묻자 녀석은 자신이 집이 어딘지 안다고 했다. 단지 내가 자신을 데려다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녀석의 우산을 대신 접어서 정리해주며 나는 녀석을 따라나섰다. 조금은 늦은 시간이라 녀석에게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었다. 잘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녀석은 아마 학교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비가 온 후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민소매를 입은 녀석에게 춥겠다고 묻자, 녀석은 엄마가 아침에 옷을 챙겨줬는데 마다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녀석은 그것 말고도 무언가 많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더욱 열정적으로 맞장구 쳐주지 못한게 아쉬웠다.
집은 멀지 않았다. 아파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녀석은 현관문 비밀번호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집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녀석은 인사를 할 틈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어두웠던 감정을 잠시나마 깨끗하게 밀어냈다.
괜히 기분이 묘했다. 별일이 아니지만, 요새 개인적인 상황이 안좋아서 그런지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녀석이 고맙기도 했다. 아직은 죽지 말라고 머리 위의 누군가가 일부러 설계한 일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