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Joker, 2019
1. 호아킨 피닉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대단했다. 극 중 조커의 웃음, 자세, 말투, 걸음걸이를 포함한 모든 행동거지는 전부 대단히 작위적이다. 몰입되지 않으면 정말 웃기고 유치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자칫 조금만 어색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보여주는 깊이는 어쩌면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당장 옆에서 일어나는 듯한 현장감이 덧대진 매우 진지한 상황으로 만들어 냈다. 대단했다.
2. 미국적 배경?
뭔가 체감해야할 미국적 배경이 필요한가 싶었다. 영화의 배경은 굳이 70년대의 뉴욕의 모습을 택했다. 왜 그 시대와 그 장소 이어야 하는지는 대충 감은 잡힌다. 하지만 그것 또한 책으로 읽은 것이었을 뿐.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뭔가 내가 더 알아야할 미국적 배경이 필요하지 않을까? 뭔가 더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그 시대와 장소의 현장감에 문화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내가 정말 영화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광대복장을 한 아서 플렉의 첫 살인 이후, 고담 전체가 시위에 뒤덮이게 되는 전개였다. 영화의 설명이 불친절한 것일지는 몰라도, 조커의 살인이 왜 사회 전체가 가진 불만을 촉발하여 폭발시키게 되었는지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직원들이 얼마나 개새끼들이었는지 현장에 없던 대중이 보았을까. 화이트칼라에 대한 단순한 혐오와 패배감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불만으로 가득 찬 대중이 광대라는 익명성에 가린 것에 매료되었을 뿐이었을까. 익명성이 문제였다면 왜 영화의 메시지는 종결까지 일관하지 못했을까. 애당초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범죄의 온상인 고담의 지하철을 그 화이트 칼라들이 밤늦게 탈수나 있었을까. 그들이 성추행하던 젊은 여자는 과연 그 전철에 타고 있을만 했을까.
3. 토머스 웨인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 의사이자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기업가로 알려진 그는 대체로 인격적으로 완성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코믹스,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토머스 웨인은 현자나 선인 쯤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넘치는 휴머니즘과 박애주의로 평생을 빈자 등 사회의 하층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토머스 웨인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그 하층민에 속하는 조 칠이라는 길거리 강도에 의해 사망한다. 토머스 웨인이 브루스 웨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는 점, 바로 토머스 웨인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극적인 힘은 자신이 도우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죽게 된다는 바로 그 아이러니다.
그런데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 등장하는 토머스 웨인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시각이 주인공인 아서 플렉을 따라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토머스 웨인은 단순히 아서 플렉을 비롯한 사회의 반항세력에 적대적이며, 위선적인 인간으로 그려진다. 아서 플렉이 찾아갔을 때 그의 어머니를 가리켜 스스럼 없이 망상증 환자라고 일컫거나, 아서 플렉에게 주먹을 날린다거나, 광대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온 시위 대중에 대해 비겁한 도피자라고 비난하는 등 그는 절대 인격적 성인의 모습은 아니다. 영화의 시각(아서 플렉의 시각, 시위 대중의 시각)에서 토머스 웨인은 우리 자신과 완전히 구분된 다른 세계의 사람이며, 권력자이며, 정치인이자, 우리 자신들을 청소해내려고 하는 존재다. 아서 플렉과 시위 대중이 수퍼 래트라면 그는 수퍼 고양이인 셈이다.
4. 망상증
토머스 웨인에게 몇 년째 계속 편지를 보내며 매달리는 듯한 아서의 어머니 페니 플렉은 망상증 환자다. 그녀는 자신과 토머스가 사랑하는 사이이며, 아서 플렉이 그의 자녀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그 부분이 등장했을 때,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뭐야.. 조커랑 배트맨이 이복형제야?.. 이런 식으로 조커와 배트맨을 대치시키는 거야?.. 이게 새로운 설정인가?.."
인생이 망칠때로 망쳐지고 있는 아서 플렉은 그 이야기를 듣고, 토머스 웨인을 찾아간다. 자신이 아들이라고, 빨리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말이다. 토머스 웨인은 그녀가 망상증 환자에 불과하다고 냉정하게 내친다. 그럴 수 있다. 아서 플렉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망상증 환자라는 게 단순히 모욕적인 이야기여서 믿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이 토머스 웨인의 자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신의 불행한 삶의 돌파구로 믿고 싶었는 듯 했다. 그는 왜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하지 않냐면서 토머스를 원망한다. 물론 그는 토머스의 말대로 아캄 정신병원에 가서 어머니가 망상증 환자임을 확인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왜 맛이 갔는지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가 이 영화 속 내 사실 중 무엇이 망상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전부 의심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중간에 뜬금없이 혼란스러워 졌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게 영화는 아서 플렉의 애인이 사실 망상이라는 걸 보여주며 나를 엿먹였다.
5. 애인
극 중 아서 플렉은 그 흑인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한 번 탔을 뿐이다. 그 여자는 흔히 하는 푸념으로 말을 잠시했을 뿐이고, 심지어 아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느닷없이 그녀의 손짓을 지멋대로 한 번 흉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스토킹한다.
이후 영화는 그녀가 아서를 찾아와 자신을 스토킹했냐고 따지면서 말도 안될 정도의 배포를 보여주며 썸을 타게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스토킹한 이상한 동네 남자에게, 심지어 딸도 있는 여자가 그렇게 대처하는 경우는 없다. 패배감과 열등감에 찌들어 여자들에게 말을 걸 자신이 없는 남성들이 상상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 뭐 그래도 병신도 짝이 있다고, 뭐 그냥 뭔가 어떤 장치적 배역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아서 플렉의 환상이었다. 정말 비참한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랬다. 만약 영화의 아서 플렉과 같은 사람에게 그러한 애인이 있다면, 그렇게 이어지는 애인이 있다면, 정말로 재미 한 개도 없는 병신 같은 농담에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애인이 있었다면, 아서 플렉은 절대 조커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라도 조커가 될 수 없다.
6. 왜 영화는 그를 죽이지 않았을까...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돈을 불태우며 이렇게 말한다. "It's not about money. It's about sending a message. Everything burns.." 그렇다. 중요한 건 메시지이다.
아서 플렉은 쇼프로그램의 호스트인 머레이를 시작으로 무차별 살상극을 벌인 후 경찰에 잡혀 연행되지만, 광대 가면을 쓴 시위대에 의해 구출되고 이 운동Movement의 시초로서 받들여진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중 한 명에 의해 토머스 웨인과 마사 웨인이 살해당하는, 바로 배트맨의 탄생 과정이 그려지기도 한다. 토머스 웨인을 죽인 건 아서 플렉이 아니라, 그에 의해 동요되고 촉발된 알 수 없는 시위 대중 중 어느 한 명, 바로 Ananymous였다.
나는 당연히 아서 플렉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조커라는 신화를 위해서, 앞으로 이어질 영화의 세계관을 위해서라도 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죽을 필요가 없었지만, 아서 플렉은 반드시 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기존의 질서와 규율에 완벽하게 반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여러 설정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의 과거도 없다. 다크나이트에서 묘사한 것 처럼 심지어 그의 옷에는 상표도 없다. 그에게는 인간적 배경도 설정도 없다. 그에게 역사적 경로와 삶의 연속성이란 없다는 뜻이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존재로서만 등장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질서와 규율따위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굳이 조커라는 이름으로 아서 플렉이라는 영화 오리지널의 이름과 삶을 부여했다면 그는 순교해야만 했다. 그는 고담시로 대표되는 사회의 불만을 대표했고, 그들의 시위라는 의사표현을 촉발시켰다. 토머스 웨인이 아서 플렉이 아니라 그로 인해 등장하게 된 광대가면에 가려진 익명의 시위자에 의해 사망한 것처럼 영화는 아서 플렉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승화하고 단지 "조커"라는 메시지만이 남는 것을 묘사했어야 했다. "조커는 누구도 될 수 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조커가 된다."라는 메시지 말이다.
그로써 최초의 조커이자 촉발자인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은 사라지지만," 조커라는 메시지는 일종의 사상으로써 어디에나 존재하게 된다. 바로 공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커"를 단지 악당캐릭터 한 명을 넘어서 어떠한 체계와 질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험, 그 자체로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만약 영화가 그렇게 아서 플렉을 순교 시켰다면, 영화적 완성도와 몰입도가 더욱 높아졌을 것은 물론, 호아킨 피닉스와 토드 필립스를 배트맨이라는 코믹스 세계관에서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차후 제작될 배트맨 단독 영화의 설정 또한 수월해질 것이며, 새로운 조커의 등장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잭 니콜슨, 히스 레저 등을 거치며 해석되고 구성되어지는 21세기 최고의 빌런 조커라는 캐릭터에 대해 호아킨 피닉스라는 대배우를 제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로써 최초의 조커이자 촉발자인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은 사라지지만," 조커라는 메시지는 일종의 사상으로써 어디에나 존재하게 된다. 바로 공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커"를 단지 악당캐릭터 한 명을 넘어서 어떠한 체계와 질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험, 그 자체로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만약 영화가 그렇게 아서 플렉을 순교 시켰다면, 영화적 완성도와 몰입도가 더욱 높아졌을 것은 물론, 호아킨 피닉스와 토드 필립스를 배트맨이라는 코믹스 세계관에서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차후 제작될 배트맨 단독 영화의 설정 또한 수월해질 것이며, 새로운 조커의 등장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잭 니콜슨, 히스 레저 등을 거치며 해석되고 구성되어지는 21세기 최고의 빌런 조커라는 캐릭터에 대해 호아킨 피닉스라는 대배우를 제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아서 플렉이 아캄 정신병원에 남아있는 것으로 끝났다. 발에 (아마도 상담사의 것이었을)피를 묻힌 채 우스꽝스럽게 도망다니는 모습으로 말이다. 음악이 밝았다.
7. 영화의 위험
우울한 분위기. 현실에 가까운 주인공의 절규. 그것의 해소 방식으로 선택한 폭력. 현대 사회 다수가 공감할 좌절을 표현하고 있기에 왜 이 영화를 위험한 것으로 여길지는 알겠다. 그러나 뭐 그렇게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니다. 이 정도 내용을 담은 영화야 머레이 역을 했던 로버트 드 니로의 택시드라이버 부터 시작해서 오지게도 많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나서 대단히 밝아질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우울해지지도 않았다. 훌륭했던 연기 덕에 몰입감은 높았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화장실가는 것도 참았다. 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이 얼마나 현실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왜 그가 직접 해소를 위해 나서지는 않았는지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린 강도들이 부수고 약탈해간 광고판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는다. 어린이 병원에 총기를 가져간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저 소품이었다는 말도 안되는 항변만을 두어번 되내일 뿐이었다. 그렇게 미쳐가던 그는 자신의 조크와 개인적 고통을 웃음거리로 썼다며 머레이를 살해한다. 모든 해소는 폭력으로 나온다. 왜 그렇게만 해야했을까.
그는 지나치게 고립되어 있다. 그는 너무나도 불행한 자신의 삶에서 나와 타인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해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건 모두가 그런 것 아닌가. 내가 영화를 보며 걱정했던 건 바로 이 점이었다. 영화를 보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영화 속 아서 플렉의 불행에 찌든 시선에 공감하여 비춰 보지는 않을까. 다들 자신만이 미저러블하다고 느끼며 타인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관점의 유혹이 있었다.
조커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