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병원에 들르던 차였다. 글 쓴다며 시골에 내려가 있는 친구가 문득 콩을 베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울컥할 만큼 슬퍼져버렸다는 감상을 내게 전했다. 나는 너무나 태연하게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 라고 시원하게 친구의 감상을 짓눌렀다. 옆에 있었다면 주먹이라도 날아왔을 것 같은 그런 속없는 대답을 듣고도 친구는 그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속 좋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의 시비성 대답의 의도를 녀석은 너무나도 가볍게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석..."
사실 난 그 사람을 잘 모른다. 노래도 잘 모른다. 약간만이라도 과거의 취향이 묻어나오는 소주집이라면 여지없이 그의 노래가 지겹도록 흘러나온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것들은 전부 까닭 없이 느려터진 진부한 노래들일 뿐이다. 그가 기타를 친다는 사실도, 그가 가사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그가 가진 깊은 호소력도, 무식한 내게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불과했다. 난 그의 아름다움을 잘 모른다.
그의 노래 중의 하나 처럼, 나이가 "서른 즈음에" 다가와서인지, 그의 감성을 노래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을 걸어놓는 친구들이 늘었고, 그의 노래에 감상 젖은 극찬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나의 "그래?" 라는 무식한 표정은 어느 덧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술에 닿은 그들은 그의 노래를 말 그대로 병신처럼 흐느꼈고, 그다지 사이가 좋을 것도 없는 친구들 끼리도 서로 "그의 감성"을 이해한다며 의기를 다지기도 했다. 그의 감성에 무지한 내게는 그저 웃기는 꼬락서니에 불과했다. 지들이 뭘 했다고...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인지는 수많은 글들이 나타내어주고 있다. 내가 아무리 그의 감성에 무식하다지만 그를 폄하하거나 비난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감성을 읊조리는 나부랭이" 들이다. 그가 가객으로써의 삶을 지낼 때, 고작 태어나기나 했을지도 모를 나부랭이들이 어느 날인가 부터 갑자기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을 흉내 내는 바로 그 꼬락서니가 우스울 뿐이다.
그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한다고 달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저 그가 대변했다는 "소시민적 감성"을 멋들어지게 허세부리는 어린애들만 보인다. 그와 같은 시대를 숨 쉬었던 386세대들의 감상은 감상이라고 해두겠지만, 그가 살았던 대기의 명암과 냄새에 마저 가까이가 볼 생각도 못했을 어린애들이 자신들의 시답지 않은 일상적 번민에 섞어 말하는 감상은 감상으로 받아주기에는 조소가 앞선다.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라고 말했던 나의 대답은 친구를 향한 조소였고, 극적인 어그로였다. 이미 비슷한 공격을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친구는 가볍게 넘겼다. 녀석은 내게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이미 내가 누구들을 겨냥하며 말했을 지가 확 떠올라서, 가만히 넘겼다고 했다. 공격이 간파당한 나로서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나는 김광석, 그의 음악이 부족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거나, 애처롭다거나 비난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비록 아쉽게도 나는 그의 감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와 그의 음악이 어떤 것이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정도는 인식할 수 있다. 내가 한심하게 보는 것은 갑작스레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에 눈물지으며 깝죽대는 친구들이다.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몰입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가?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대하고 있으며, 진정으로 고상한 가치를 향해 숙고하고 있는가? 최소한 내가 볼 때 그들은 아니다.
「결핍될수록, 그것에 몰입한다. 겉으로.」 오늘도 나는 그들이 역겹다고 한 번 더 생각한다. 마치 예수는 사랑하지만, 예수를 노래하는 소시민들은 역겨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