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


  잠깐 병원에 들르던 차였다. 글 쓴다며 시골에 내려가 있는 친구가 문득 콩을 베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울컥할 만큼 슬퍼져버렸다는 감상을 내게 전했다. 나는 너무나 태연하게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 라고 시원하게 친구의 감상을 짓눌렀다. 옆에 있었다면 주먹이라도 날아왔을 것 같은 그런 속없는 대답을 듣고도 친구는 그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속 좋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의 시비성 대답의 의도를 녀석은 너무나도 가볍게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석..." 

  사실 난 그 사람을 잘 모른다. 노래도 잘 모른다. 약간만이라도 과거의 취향이 묻어나오는 소주집이라면 여지없이 그의 노래가 지겹도록 흘러나온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것들은 전부 까닭 없이 느려터진 진부한 노래들일 뿐이다. 그가 기타를 친다는 사실도, 그가 가사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그가 가진 깊은 호소력도, 무식한 내게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불과했다. 난 그의 아름다움을 잘 모른다.
  
  그의 노래 중의 하나 처럼, 나이가 "서른 즈음에" 다가와서인지, 그의 감성을 노래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을 걸어놓는 친구들이 늘었고, 그의 노래에 감상 젖은 극찬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나의 "그래?" 라는 무식한 표정은 어느 덧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술에 닿은 그들은 그의 노래를 말 그대로 병신처럼 흐느꼈고, 그다지 사이가 좋을 것도 없는 친구들 끼리도 서로 "그의 감성"을 이해한다며 의기를 다지기도 했다. 그의 감성에 무지한 내게는 그저 웃기는 꼬락서니에 불과했다. 지들이 뭘 했다고...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인지는 수많은 글들이 나타내어주고 있다. 내가 아무리 그의 감성에 무식하다지만 그를 폄하하거나 비난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감성을 읊조리는 나부랭이" 들이다. 그가 가객으로써의 삶을 지낼 때, 고작 태어나기나 했을지도 모를 나부랭이들이 어느 날인가 부터 갑자기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을 흉내 내는 바로 그 꼬락서니가 우스울 뿐이다. 

  그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한다고 달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저 그가 대변했다는 "소시민적 감성"을 멋들어지게 허세부리는 어린애들만 보인다. 그와 같은 시대를 숨 쉬었던 386세대들의 감상은 감상이라고 해두겠지만, 그가 살았던 대기의 명암과 냄새에 마저 가까이가 볼 생각도 못했을 어린애들이 자신들의 시답지 않은 일상적 번민에 섞어 말하는 감상은 감상으로 받아주기에는 조소가 앞선다.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라고 말했던 나의 대답은 친구를 향한 조소였고, 극적인 어그로였다. 이미 비슷한 공격을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친구는 가볍게 넘겼다. 녀석은 내게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이미 내가 누구들을 겨냥하며 말했을 지가 확 떠올라서, 가만히 넘겼다고 했다. 공격이 간파당한 나로서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나는 김광석, 그의 음악이 부족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거나, 애처롭다거나 비난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비록 아쉽게도 나는 그의 감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와 그의 음악이 어떤 것이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정도는 인식할 수 있다. 내가 한심하게 보는 것은 갑작스레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에 눈물지으며 깝죽대는 친구들이다.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몰입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가?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대하고 있으며, 진정으로 고상한 가치를 향해 숙고하고 있는가? 최소한 내가 볼 때 그들은 아니다. 

  「결핍될수록, 그것에 몰입한다. 겉으로.」 오늘도 나는 그들이 역겹다고 한 번 더 생각한다. 마치 예수는 사랑하지만, 예수를 노래하는 소시민들은 역겨운 것처럼.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부끄럽지 않은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시인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어느 연구재단에서 사무를 맡을 때 였다. 역삼동의 어느 회장님께 소포를 하나 전해드려야 하는 일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전철을 타고 다녀오려던 찰나에, 오찬 모임이 있으시던 이사장님께서 자신이 가는 길에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어려운 옆좌석에 앉아 가게 되었다. 어렸던 내게 이사장님은 까마득한 어른이었다. 침묵 속에 대교를 건너고, 시내를 지났다. 문득 이사장님은 내게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좋아하는 일이라... 그 따위게 있을 리가 없다. 행여 있다고 해도 그 까마득함은 나의 입이 열리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기약없는 대답을 전해드렸다. 7, 80년대 라는 고된 시기를 치열함 하나로 버티며, 지금의 영광을 이끌어 낸 이사장님께, 대학 후배이자, 자신이 힘들게 이룩한 시대를 이어받아야 할 후 세대의 젊은이에게, 패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따위 대답은, 깊은 분노와 허무함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신 분들이 의래 그렇듯, 이사장님은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시지 않았다. 아니, 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사장님은 조용히 내게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자신을 이끄는 지 그리고 이끌어 왔는지, 결국 왜 "그 것"을 찾는 것이 그리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를 차분히 일러주셨다. 
  이사장님은 오찬 장소가 있는 남산의 어느 호텔에서 내리셨고, 인상이 매우 좋으셨던 기사님은 내게 이사장님이 앉으셨던 자리로 옮겨서 앉아보라고 하셨다. 마치 젊은 사장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라며 농담을 건네셨다. 기사님은 편안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품위가 느껴지는 분이셨다. 기사님과 밝게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대교를 건너고 시내를 지났다. 문득 기사님도 내게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좋아하는 일이라... 그 따위게 있을 리가 없다. "아직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이사장님의 조찬 모임 부터 챙기고, 디너 파티라도 있는 날이면 숨 궃은 지하에서 홀로운 고독을 버티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치 않으셨던 기사님께는 정말이지 기운 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기사님은 밝게 웃는 얼굴로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찾아보라고 격려해주셨다. 기사님은 아까 전에 이사장님께서 하신 말씀들에 깊히 공감하고, 그런 면에서 자신은 이사장님을 존경한다고 말하셨다. '이런 저런 일도 해봤다. 사업 실패도 해봤고, 지금은 기사일을 하면서도 방송대를 통해 경영학을 공부한다. 자신이 인생의 모든 면을 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도 자신의 생각 또한 이사장님과 같다.' 기사님은 성공은 "좋아하는 것"의 가까이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게도 "인상이 강해서 꼭 좋아하는 것을 잘 찾아서 성공할 것"이라고 덕담까지 해주셨다.

  아이러니하다. 조금은 속된 관점일지 모르지만, 두 분은 계급적 사회의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을 각각 대표하시는 분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내게 했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이 단지 세속적 의미에서의 성공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기사님의 말 할수 없는 품격만 떠올려봐도 그렇다.「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하고 난 이후에도 시도한다. 그것이 그들이 숭고함을 주는 이유다.」그들이 공통적으로 내게 말했던 이야기다. 그 날의 경험은 내게 큰 존경과 희망을 주었다. 그들 각각의 몫인 존경 그리고 내 자신의 몫인 희망. 

  때로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있으면 가끔 위의 경험이 떠오른다. 같잖은 군상들이 내뱉는 역겨움. 희망과 존경이 사라진 소시민적인 상면. 오로지 남의 덕을 보고자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두리번 거리는 듯한 천박함. 그들의 관심사는 그저 전세 값이 얼마인지, "자기 집"을 얻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청약주택적금을 퍼부었는지, 어쭙잖은 국산 차를 몇 개월 할부, 어떤 옵션으로 샀는지, 누구 자식 새끼가 제일 등수가 높은지, 누구 자식 새끼가 공무원이 먼저 되는지,  누구 결혼식에 누가 돈을 많이 냈는지, 누가 가장 알랑거리는 지 따위다. 사실 삶에 있어서 그것들 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정말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그저 정말 살기만을 위해서 말이다. 
  특별히 대단하게 성공한 사람도 없다. 특별히 대단하게 망한 사람도 없다. 그저 시기심 가득찬 그저그런 인간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연회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누구도 내게 "좋아하는 일"이 무언지 묻지 않는다. 그들이 내게 해주는 이야기란, 그저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빨리 취직해서, 꼬박꼬박 월급을 모아서, 도무지 만기란 것이 보이지도 않는 할부와 대출로 집과 차를 사서, 새끼들 낳고 적당히 살아가라는 것 뿐이다. 그들은 그것이 성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들은 철저히 두려워하면서 산다. 그들은 자잘한 실패마저 철저히 두려워하며 산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존경을 망치고, 스스로가 희망을 없앤다. 그리고서는 이 어두움이 전부 여당과 상류층들이 망친 잘못된 한국 사회 구조 때문이라며 탓한다. 그들 스스로에게 자신들의 모습은 지극히 성실하고 정의로운 모습이다. 실상은 그저 처절하리 만큼 초라한 소시민들의 모습 뿐인데 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나나 당신이나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