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족. 여성의 작은 발에 대한 선호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발의 성장을 강제적으로 억제하여 기형적으로 작은 발을 만들었던 관습이다. 중국의 북송시대 부터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비슷한 것으로 코르셋이나 현대의 하이힐 같은 것이 있다. 할례까지는 아니겠지만, 여성을 잔인하리 만큼 제약하는 관습이라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말도 안되는 제도로 보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종류만 달랐지 현대나 그 때나 뭐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비슷한 수많은 제약이 있다. 영상매체와 인터넷에서는 끊임없이 신체적이고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극한의 다이어트와 운동 등이 강조된다. 겉으로 보기에도 대단히 불편해 보이는 하이힐이나, 복잡한 화장, 짧은 치마 등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여자와 조금 오랜 시간 산책했었을 때였다. 그 여자는 불편한 하이힐 때문에 발이 다 까져 피를 흘렸다. 불편한 신발을 그녀가 허리통증을 호소하게 만들었고, 짧은 치마와 타이트한 블라우스는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를 긴장하게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흘리는 땀은 화장을 끊임없이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써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얼마나 배려심이 없는 개새끼인지 죄책감을 느껴야했고, 동시에 왜 여자들이 차있는 남자에 왜 그리도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2.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어떤 여성이 느닷없이 살해당했다. 무언가 억울한 측면들을 많이 느끼는 여성집단 전체를 자극한 것인지, 대다수의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10번 출구로 향했다고 한다. 그들은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것인지를 외쳤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남성 집단에 대한 혐오까지 드러냈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할 수 있다는 위협과 공포는 그들 집단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냈던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그만해"라고 화를 내었을때, 가장 분노했다. 그녀는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이 물리력에 따른 위계를 강요하고 자신을 강제로 억누르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결국 자신이 "여성"이며, "약자"이기 때문에 물리력의 공포에 억압당해야하나 라는 생각의 피해의식과 부조리함 그리고 무력감이 분노케한다는 것이다.
3.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조직이든 실제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남성이고,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은 대다수가 남성이다. 출산과 육아의 부담까지 지고 있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루기란 대단히 쉽지 않다. 어떤 여성이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면, "여자인데 대단하다."라는 말이 쉽게 나오기도 한다. 어쨌건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 내에서 여성이 마이너에 속하는 것이 현실인 듯 하다.
재미있는 점은 살해한 용의자가 여성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마치 역차별을 느꼈다는 것처럼 보여지는 발상이었다. 뭐 딱히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 것 같긴하다. 보나마나 여성들에게 구애하다가 거절 당했거나, 만나던 여성에게 흔한 치정적 상처를 입었다거나, 뭐 그런 내용일 것이다. 한 친구는 이 사건을 가리켜 메타적 치정 살인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4.
사건은 다양한 함의를 주었지만, 자꾸 여혐, 남혐의 성대결의 이미지만 보여지는 것 같다. 여존남비 사상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가 부각되는 것도 참 웃기는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을 신나게 떠받들고, 남성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라고 칭해봤자, 사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은 사회에서 차별 받을 거고, 여성에 대한 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남성, 그리고 가까운 남성들로부터 말이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봤자, 남성이 물리적인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테니스 세계랭킹 1위인 노박 조코비치는 남자 테니스가 여자 테니스보다 경기도 길고, 인기도 더 많은데 상금을 똑같이 받는 건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가 광범위한 비난을 받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조코비치의 말이 아예 틀릴 것도 없다. 남자테니스 그랜드슬램은 5세트인데 여자는 3세트다. 실제로 모든 화제는 남자테니스로 주로 간다. 이는 어떤 스포츠이던 마찬가지다. 그게 피겨 스케이팅이 아니라면 말이다. 조코비치를 비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대회 상금을 똑같이 주는 건, 남녀가 같지 않다는 걸 알지만서도 규범적으로 남녀 평등을 이루기 위해 시행하는 하나의 인위적 조치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느낌이 없진 않다. 다만 억지로라도 제도를 갖추어 유지해나가면서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현재 우리사회도 비슷한 것 같다. 여성은 광범위적으로 불리함을 얻고 있다. 어떤 직함을 얻는 앞에 "여" 라는 글자가 붙는다. 심지어 정부부처에는 여성부가 있다. 하지만 여성을 돕고자 하는 그러한 조치들이 또한 여성이 마이너이고, 희소하며, 약자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 같다.
그럼 용의자는 왜 그런 hate crime을 저질렀을까. 그도 알거다. 분명 자신은 사회적 강자다. 언제나 이성에게 먼저 접근하고, 먼저 구애하고, 먼저 모든 것을 제공하는 쪽은 남성 쪽이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했을거다. 대충 적당히 하면 뭐가 될 줄 알았을 거다. 그러나 그는 좌절과 거절의 경험만 겪었을 거다. 그는 사회적 강자이긴 한대, 실질적인 강자는 아니었을거다. 이성관계에서 필요한 대단한 매력이나 대단한 재력이 그것이다. 사실 전자보단 후자에서 좌절을 더 크게 느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유사한 좌절감에 따른 여성혐오는 여러 남성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집단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이 분명 사회적 강자에 속하는 데 왜 좌절을 겪어야 하나라는 분노에는 당연히 이미 여성을 마이너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규범적, 윤리적으로는 완전히 엇나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사고가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닌것 같다. 여성은 그저 성적대상 혹은 유흥의 대상일 뿐이다. 마치 멋지게 넥타이를 차려 맨 교육받은 현대 남성들이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들을 보며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것과 같은 맥락일 뿐이다. 실제적으로 그가 맞든 틀리든, 어쨌건 용의자는 멍청했고, 살인을 저질렀다.
5.
여성들은 깊은 공포를 느꼈고, 거리에 나왔다. 이 사회가 자신들을 얼마나 차별하는 지를 부르짖었다. 유감스럽긴 하지만,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어쩌라는 건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나의 한 사회적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저러한 운동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을 거라는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이것이 어떤 새로운 무엇을 일으키고 동시에 부조리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라는 점에는 깊이 회의적이다. 억울하다고 대단히 외쳐 여성의 지위에 필요한 어드밴티지 하나를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들의 지위가 변화할 것인가. 단지 마이너하다는 특성만 더욱 강조될 뿐일 것이다.
전족 문제의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전족 제도의 유지에 상당수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이다. 마치 88만원세대의 저자가 현재 청년 문제를 "Winner takes all"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전족 관습에서도 똑같이 "Winner takes all"인 문제가 일어난다. 발을 작게 만드는 데 성공한 여성들은 노동에서 배제되었고, 보다 풍요로운 사회적 신분과 환경을 제공받았다. 발을 작게 만들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삶은 편해진다. 그것은 발을 작게 만드는 데 성공한 여성들이 하나의 배타적인 집단을 이루는 요인이 된다. 여성은 이분화되고, 좌절과 행복이 끊임없이 나뉜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 곳인데,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냥 발만 작게 만들면 된다. 그럼 인생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끊임없이 이 제도를 강요하고 재생산한다. 당연히 남성들도 환영하는 일이다. 여성 스스로 이 모든 걸 만들었다는 건 아니다. 그 제도의 피해자이자 객체인 여성이 제도의 재생산에 적극 기여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얼마나 피곤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다양한 차별적 시각 그리고 일상적인 성추행으로부터 끊임없이 노출되며 살고 있는지는 뭐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도 여전히 본질적인 것들은 외면되고 있는 것 같다. 차별에 분노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마치 노동자 집단이 이분화 되어있는 것 처럼 여성집단도 이분화 되어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조금 귀엽고, 조금 이쁘고, 조금 몸매가 좋다면, 충분히 많은 성적인 관심을 통해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혼을 커리어의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보조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장비 정도로 여기는 것과 다른 측면이다. 남성에게 커리어를 통해 책임져야할 일이라면 여성에게는 그것이 커리어 그 자체다. 과장해서 말하면, 단지 예뻐지는 것 만으로 자신의 삶의 윤택함을 남성을 통해 모두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오래된 관습과 전통이 가득한 사회에 의해 좌절된 그들이 결혼을 커리어로써 고려한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비난까지 받을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처럼 분노하는 양성평등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바로 그 비열한 사회에서 성공해내야 한다. 10번 출구에서 모인 여성들도 어차피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성혐오가 없다고 착각하는 자신의 남성"에게 돌아갈 거다. 그리고 또 다시 피해자는 생길 것이다. 물리력, 성적인 긴장 그리고 능동의 포지션을 과점하는 남성이라는 특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성의 틀로 건설된 사회라는 세계 안에서 온전히 평등한 대우를 얻고자 한다면, 단지 들고 일어나 소리지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수많은 영역에서 가시적이고 실체적인 성공을 얻어내야 한다. 물론 그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외모적 아름다움으로써, 남성의 보호 아래 쉽게 살고자 하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전족"처럼 "외모"로 올인해 유혹에 굴복해도 상관없다. 단, 그럴거라면 사회적 차별에 분노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건 한 세트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