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테니스계에는 로저 페더러가 무릎부상으로 시즌 리타이어를 선언하여 올림픽에도 불참할거라는 뉴스 그리고 주요선수들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와 2위인 앤디 머레이(영국)이 출전을 결정지었다는 소식이 주요 화제가 되었다. 이어 2016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 결승에서 맞붙었던 조코비치와 머레이중 누가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화두였다.
올해 치뤄진 그랜드슬램 중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은 조코비치, 윔블던은 머레이가 우승했다.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 결승은 두 선수 간 대결이었고, 그 외에도 로마 마스터즈와 마드리드 마스터즈에서도 결승에서 맞붙었다. 각각 1,2위에 나이도 동갑인 두 선수는 라이벌이라고 불릴법도 하다.
비록 머레이가 지난 2012 런던 올림픽 챔피언이긴하지만, 사실 7:3정도의 상대전적 차이만봐도, 그랜드슬램 우승 12:3이라는 전적만 봐도, 머레이는 조코비치의 라이벌이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 로마마스터즈도 나달, 니시코리를 비롯해 힘든 상대만 죽죽 만나 체력쏟은 조코비치의 컨디션이 문제였다는 게 사실상 정론이다. 특히 호주오픈 결승은 조코비치가 머레이에 레슨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랑스오픈 결승은 머레이가 1세트를 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이나 정신력이나 모두 조코비치가 압도적이라는 걸 확인 했을 뿐이었다. 작년부터 이어진 조코비치의 폼은 올시즌 남자테니스에서 전무후무한 캘린더 골든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냐 마냐가 화두였지. 머레이와의 라이벌리 따위는 없었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번 리우 올림픽도 이변이 없는 한 조코비치가 안정적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나달도 이번 올림픽 출전의사를 표명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챔피언인 그는 딱히 동기부여가 없을 것임에도 이번 올림픽에 단식은 물론 복식과 혼합복식까지 출전할 생각이라고 한다. 올 시즌 프랑스 오픈에서 부활한 듯한 폼으로 두 경기를 가볍게 이겼으나, 왼손목 부상으로 또다시 재활에 들어가야했다. 그리고 이번 회복과 함께 리우에서 복귀전을 갖는다.
그새 4위까지 올려놓았던 나달의 랭킹은 다시 5위로 한단계 하락했다. 작년 이맘때쯤, 2005년 이래 거의 10년여만에 랭킹 두자리수를 찍은 나달은 그후 하반기 하드 코트 시즌에 나름 준우승 4강 등을 거두며 조금씩 회복하나 했으나, 올시즌 호주오픈 1회전 탈락으로 다시 나락으로 빠지나 싶더니, 인디언 웰스에서 선전하고 몬테카를로 마스터즈와 바르셀로나 오픈을 오랜만에 석권하며 또다시 반등했었다. 그리고 출전한 본인의 주무대인 프랑스 오픈에서 부상당한 것이다.
또 조코비치인가
사실 나달이 출전하건 말건 이번 올림픽은 사실상 조코비치가 우승하지 않을까 싶다. 충격의 윔블던 3라운드 패배 후 조코비치는 마스터즈 1000시리즈인 로저스 컵을 가볍게 우승하면서 폼을 끌어올렸다. 현재 조코비치의 상대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런던 올림픽 때나 2013, 2014 롤랑 가로스 때 처럼 본인의 멘탈이 느닷없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딱히 패배할 것 같지 않다.(조코비치의 올해 윔블던 패배는 우천이나 조코비치 본인의 심리적 압박감 등의 요인도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대였던 샘 쿼리가 그냥 인생경기를 한 것 같았다.)
물론 최근 너무 잘해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조코비치의 고질적인 약점은 멘탈이었다. 불과 작년 프랑스오픈만 해도 바브린카를 상대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라켓을 집어던져부쉈고, 올해 로저스 컵에서도 니시코리 케이를 상대로 앞서고 있으면서도 몇번이나 라켓을 부수려했다.
내가 테니스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구들과 나는 조코비치를 조코뱅크라고 부른다. 같이 테니스를 치는 어른 중 한 분이 조코비치를 조코뱅크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했다.
나에게 조코뱅크 테니스는 좀 재미가 없는 편이다. 가장 재미없는 경기 조합이 조코비치와 머레이의 맞대결이다. 조코비치의 경기는 축구로 치면 첼시같은 느낌이다. 조코비치는 기계적인 플레이로 유명하다. 안 그래도 마르고 길쭉한 몸을 더 늘어뜨리면서 공을 받아내는 데, 그것이 정확한 카운터로 날라간다. 그래서 조코비치는 베이스라인 뒤에서 좌우로만 왔다갔다하며, 공을 드라이브로 상대에게 넘기는 것이 주 플레이 패턴이다. 랠리가 길어진다 싶으면 드롭샷을 쓴다. 그러면 네트하나를 두고 살짝씩 넘어오는 볼들을 주고 받는 싸움을 한다. 여기서 조코비치는 가히 예술적이다. 완전 반대편 코트 살짝 앞으로 정확하게 넘긴다. 상대는 받을 수 없거나 받아도 공이 떠서 조코비치가 발리로 마무리한다.
조코비치의 양손 백핸드는 올타임 넘버 원으로 손꼽힌다. 어느 방향이든 정확하고 강력하게 나간다. 웨스턴 그립에서 나오는 탑스핀 포핸드는 나달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스핀과 파워를 지닌다. 무엇보다 조코비치 스트록의 강점은 코트 가운데나, 짧은 볼이 많지 않고, 카운터 조차 거의 깊숙한 코트 구석으로 날아간다는 점이다.
약점이라면 멘탈(..)과 포핸드 에러, 서브와 발리가 있지만, 요즘 조코비치는 포핸드 에러도 상당히 줄어들었고, 서브는 2010년 자세 교정 후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평이다. 발리는 애초에 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냥 스트록 치다 드롭샷 치고, 살짝 다시 툭 넘기고 끝이 난다. 말그대로 거의 저 3개 패턴이 사실 상 전부다. 심지어 슬라이스도 거의 치지 않는다. 앤디 머레이의 플레이 스타일도 비슷한 편이다. 그래서 그 둘의 경기는 머레이가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뛰다니고 힘들어한다는 거 빼면, 딱히 볼 게 없다. 게다가 어차피 이변이 없는 한 거의 조코비치가 이긴다.
기계적이라는 점, 무결점이라고 불리운다는 점, 철저히 정갈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의 외모 등, 왠지 내게 조코비치는 정이 가질 않는다. 그리고 녀석 때문에 테니스계는 더욱 재미없어진 것 같다. 그저 거의 독보적이다. 현재(2016. 08) 2위인 앤디 머레이와는 랭킹 포인트차는 6,000점 가량 차이난다. 조코비치가 윔블던에서 난데없이 탈락하고 머레이가 우승하기 전에는 거의 10,000점 가까워 보일만큼 차이가 났었다. 2위라는 머레이가 조코비치에게 딱히 위협적인 선수가 아닌데다, 페더러도 체력적으로 부치는 모양새이고, 나달은 이미 나가 떨어졌다. 빅4가 저러는 데, 다른 선수들은 이변의 주인공이라도 되지 않는 한, 애초에 위협도 되지 못한다. 2015 프랑스오픈에서 충격의 패배를 안겼던 바브린카가 해볼만 하나 싶었지만, 그 이후로 모두 조코비치가 승리했다. 올 시즌도 조코비치는 딱 4번 졌다. 윔블던에서 샘 쿼리, 로마에서 앤디 머레이, 몬테 카를로에서 지리 베슬리, 두바이에서 펠리시아노 로페즈에게 경기 도중 눈부상으로 기권패. 벌써 타이틀만 7개를 땄다. 사실상 거의 독식이나 다름없다. 작년 성적은 82-6이다. 역대급 성적이다. 최다 상금 랭킹도 갈아치웠다. 딱히 마이클 조던이 보여줬을 법한 극적인 승부도 없었고, 극적인 라이벌리도 없었다. 그냥 여유있게 전부 우승했다.
왠지 로저 페더러는 황제라는 품격과 우아함이 느껴졌고, 플레이스타일이 올라운드라는 평가에 걸맞게 다양하게 상대를 쥐어팼다. 누구보다도 독보적으로 1위자리를 지켰지만, 그에게는 나달이라는 천적이자 라이벌이 있었다. 그 둘은 철저히 다른 스타일의 선수다. 그래서 명경기도 많이 나왔고,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그런 면에서 조금 흥미를 끄는데는 부족한 면이 있는 듯하다. 너무 여유있게 이기고 우승한다. 그의 플레이는 앞서 말한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나달이 잘할 때, 조코비치에게 라이벌리가 성립하면서 둘의 경기도 Animalistic Rally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흥미진진한 경기가 나왔다. 특히 2013년 US OPEN 결승이나 2012년 호주오픈 풀세트 접전은 2008년 윔블던 만큼 역대급급으로 흥미로운 경기들이었다. 하지만 나달이 나가떨어진 지금 조코비치의 테니스 천하는 조금 지루할 만큼 흥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다시 나달
나는 나달의 팬이다. 내가 처음으로 쓴 제대로된 라켓이 2014년 롤랑가로스에서 나달이 사용했던 바볼랏의 에어로 프로 드라이브 2014 롤랑가로스 한정판이었다. 현재 메인으로 쓰는 라켓도 나달이 2013년 하반기 북미 하드코트를 씹어먹을때 쓰던 2013 버전 에어로 프로 드라이브다. 처음으로 제대로 경기를 본 것도, 나달과 페더러의 2008년 윔블던 결승이었다.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굉장히 흥미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왠지 고상하고, 거들먹거리고, 배나온 돈좀 만지는 아저씨들이나 하는 스포츠처럼 보였다. 이제 80살은 됐을 법한 이명박씨가 즐기는 것이 테니스라는 것이 내가 테니스에 대해 바라보는 정확한 이미지였다.
테니스 선수들도 왠지 조금 그래 보였다. 흔히 보이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르브론 제임스라는 아이콘까지만은 아니더라도, 강하고 격렬한 모습은 커녕 그냥 비리비리한 동네 아저씨들 같았다. 게다가 백인들이 주류다 보니 희멀겋고 가는 팔뚝으로 스트록을 치는 테니스 선수들의 이미지는 내게 사실 비호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라파엘 나달을 발견했다.
압도적인 수준의 탑스핀 포핸드. 백핸드로 오는 볼을 돌아서서 장기인 포핸드로 때리는 엄청난 활동량과 스피드. 바로 그 활동량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도무지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볼까지 끝까지 쫓아가서 어떻게든 상대방 코트에 집어넣는 근성. 상대의 일방적인 발리게임에 근성으로 만들어낸 수없은 패싱샷과 카운터. 경기가 길어질수록 에너지를 더욱 얻는 것 같은 방대한 체력. 테니스계의 그 어떤 선수에게서도 보기 힘든, 말과 같은 엄청난 근육량. 그 거대한 근육을 갖춘 팔을 비꽈서 돌려치는 핼리콥터 스윙으로 스핀과 파워는 반비례한다는 인식을 집어삼키고, 엄청난 스핀과 파워를 동시에 발현하는 포핸드. 테니스의 황제라는 로저 페더러에 유일하게 압도적인 상대전적으로 괴롭히며 페더러의 약점을 찾아낸 2인자. 이미 스무살때 피로골절로 한쪽 발목이 박살났으나 끊임없이 재활과 회복을 반복하며 코트에 등장한 선수. 9번 동안 롤랑가로스를 독점하며, 여러 선수의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가로막았던 선수. 로저 페더러와 함께 나이키 테니스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 희멀건 범생이들같은 테니스 선수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그을린 피부와 근육. 정석과는 거리가 먼 테니스 스킬로 헬리콥터 스윙을 유행시킨 선수. 바로 라파엘 나달이었다.
2인자 나달
나달은 "1인자"나 "최고"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나달이 랭킹 1위에 머물러 있던 시간은 141주 정도이다. 상당히 긴 시간이긴 하지만, 함께 빅4로 불리우는 로저 페더러(302주), 노박 조코비치(2016. 8까지 210주)에 비하면 뒤진다. 노박 조코비치가 2014년 중순부터 현재까지 2년여를 연속으로 랭킹 1위에 오르면서, 기록을 뒤집기는 했지만, 나달이 1위를 기록할 때 2위와의 랭킹 포인트 차이와 현재 조코비치의 그것과 비교하면, 현재 조코비치의 2년 연속 1위는 사실상 대적할 상대가 없는 압도적인 1위다.
여기에 로저 페더러는 사실상 올타임 넘버 원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에 비해 나달은 넘버 원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기에는 뭔가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다. 느닷없이 1라운드 탈락하는 것도 나달이 유난하다. 로저 페더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던 것도 나달이 2인자 혹은 도전자로써 이미지를 갖추는데 기여했다.
물론 나달이 부정할 수 없는 최고로 평가받는 영역도 있다. 바로 클레이 코트이다. 클레이의 제왕이라는 별명처럼 나달은 압도적인 클레이 승률과 기록을 가지고 있다. 대 로저 페더러 승률이 압도적인 것도 사실 대다수의 경기를 클레이에서 맞붙어서 그렇기도 하다. (잔디코트 1-2, 인도어하드 1-5, 아웃도어 하드 8-2, 클레이 코트 13- 2)
미끄러질수 있는 클레이코트는 나달의 활동력을 배가시켰고, 클레이의 큰 바운드는 나달의 방어능력을 더 높이면서 동시에 그의 몬스터 탑스핀 스트로크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웃도어 코트의 특성상 예측할 수 없는 풍향이나 습도 등은 스핀이 큰 나달의 공을 더욱 받아치기 힘들게 만든다. 클레이코트에서만은 나달이 올타임 넘버원으로 불리울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2013년부터는 주력인 클레이 코트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몬테카를로, 마드리드, 로마 이렇게 3개의 클레이 마스터즈 대회를 석권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조코비치의 득세이후 클레이코트에서도 조코비치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올해 얻은 몬테카를로 마스터즈도 조코비치가 베슬리라는 신예에게 느닷없이 탈락하는 바람에 덕을 보았다. 바브린카나 머레이 등을 꺾으며 우승하긴 했지만, 애초에 바브린카나 머레이는 그래도 아직은 나달에게, 그것도 클레이에서는 열세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클레이인 얼해 마드리드 마스터즈에서 또다시 머레이에게 패하면서 그것 또한 의심받고 있는 지경이다.
언제나 나달은 도전자였다. 오히려 1인자의 위치에 올라있는게 이상해보였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페더러 1위, 나달 2위가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랭킹같다. 그 둘은 언제나 맞붙었고, 언제나 명경기를 보여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대자같은 페더러가 나달에게만 깨지니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나달은 페더러를 이겼지만, 언제나 2위였다. 페더러에게 랭킹 1위 자리를 뺐은지 1년 만에 그는 1위에서 물러났다. 부상 때문에 경기를 쉬면, 당연히 랭킹 포인트가 급락했고, 그의 랭킹은 떨어졌다. 하지만 금방 또다시 회복해 복귀하여 차근차근 포인트를 땄고, 금방 탑에서 경쟁하였다.
나달의 경기 중 아쉬운 것이 있다면, 2014년 호주오픈에서 아쉽게 바브린카에게 졌을 때였다. 경기도중 부상치료까지 받아가며 치뤘던 경기는 1-3으로 나달이 패했다. 무작정 경기 중 부상치료를 받는다고 여러 비난까지 받았던 나달이었다. 만약 그걸 우승했다면 그랜드슬램을 더블로 이뤘을 것이다.
나달이 마지막으로 그랜드 슬램 우승을 했을 때는 내가 병원 생활에 찌들어있을 때였다. 최근 한 2년은 나달에게는 최악의 시기이다. 한번도 그랜드 슬램 우승을 못했다. 오히려 마스터즈 대회, 그것도 본인이 주력인 클레이 대회에서도 변변찮았다. 심지어 라이벌 중 한 명인 조코비치에게는 만날 때마다 쥐어터졌다. 2015년 프랑스오픈도 조코비치에게 가볍게 3대 0으로 졌다. 이제 그는 조코비치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경기를 봐도 뻔히 보인다. 여유있는 스코어도 스코어지만, 경기내내 주도하고 있는 건 조코비치다. 나달은 공을 겨우 받아 넘기기에 바쁘다. 노련해지기까지한 조코비치는 이제 실수도 별로 없다. 그의 카운터는 귀신같이 코트 구석으로 찍힌다. 어떻게 저렇게 치나 싶을 정도다. 반면에 나달의 공은 힘들게 한 공격조차 공이 짧거나 조코비치에게 여유있게 카운터 당한다. 이동거리도 나달이 압도적으로 길다. 조코비치의 드롭샷 네트 플레이는 이제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그렇게 나달은 쥐어터졌다.
경기가 끝나고 여유로워 보이는 조코비치에 비해 나달은 곧 죽어가는 사람같다. 소년같던 20대 초중반에 비해 현재의 나달은 부쩍 늙어버렸다. 머리는 탈모가 있는 지 힘이 많이 빠졌고, 시커먼 피부는 주름과 함께 안쓰러워 보이는데 일조한다. 거짓말 처럼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조코비치나 머레이, 그리고 심지어 페더러와 비교해도 나달만 부쩍 늙어 보인다.
황제인 페더러의 천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정석적인 테니스와는 다르다는 면에서 나달은 상당히 많은 질투를 받았던 모양이다. 물론 그에게 환호하는 팬들도 엄청나게 많지만. 나달은 지나친 활동량 때문에 선수생활이 짧을 것이라거나, 팔에 부담을 많이 주는 타법때문에 팔과 손목, 관절이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비평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상식적으로 그래보인다. 2015년 부터 나달은 장기인 스피드 마저 굉장히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게다가 나달의 톱스핀 드라이브 볼은 파워가 제대로 안실려 공이 베이스라인 까지 뻗지 못하면, 딱 상대가 공격하기 좋은 볼이된다. 요즘은 경기만 봐도 힘들어보인다. 나달이 베르다스코에게 져서 2016 호주오픈 1회전에서 탈락했을 때, 베르다스코에게는 과거 승리 이후 최근 연패라며 나달도 끝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코트장에 있을 때도, 테니스 코치나 선수, 동호인들로 부터 나달은 끝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달은 계속 도전한다.
2010년에도 2013년에도 나달은 부상에서 돌아와 화려하게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는 그리 녹록치 않다. 2년째 끊임없이 지고 있는 조코비치가 누구보다 싫을 것이다. 과거의 조코비치는 단지 3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조코비치에게 상대전적도 앞섰고, 연말 하드코트 시즌이 아니라면 그는 나달이 딱히 두려워할만한 선수도 아니었다. 2013년에는 그 연말 하드코트 시즌에서도 조코비치를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코비치에게만 7연패 중이다. 나달이 부활할만 하면, 제동을 걸었던 것이 노박 조코비치이다. 2015년도 몬테카를로 준결승을 시작으로 롤랑가로스, 오랜만에 인도어 하드에서 선전했던 베이징이나 월드투어파이널에서도 모두 조코비치에게 가로막혔다. 올해의 시작인 도하에서도 결승에서 만난 조코비치에게 패했고, 즈베레프라는 샛노란 신예에게 다 질뻔한 거 겨우 역전하고 올라간 인디언 웰스 4강에서 그를 가로막은 것도 조코비치이고, 몬테 카를로와 바르셀로나 대회 연속 우승으로 롤랑가로스까지 선전을 기대하던 로마마스터즈 4강에서 또 조코비치에 가로막혔다. 심지어 한 세트도 못땄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인터뷰에서 조코비치가 대단한 선수이며, 그가 이긴 건 그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욱 연민이 느껴졌다. 페더러와 자웅을 겨루던 시절, 조코비치 따위 그냥 상위권 선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본인이 본인 스스로에게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나달의 타법과 플레이스타일을 끊임없이 흉내내는 나에게 마저도 많은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한다. 나달은 끝났다고 말이다. 조코비치의 유연성과 정확도를 연습하라고 한다. 심지어 내가 그런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짜증이 밀려오는데, 나달은 오죽할까 싶다. 2015년에 부진하자 사람들은 나달이 삼촌인 토니 코치에서 벗어나 페더러나 머레이, 조코비치처럼 새로운 코치를 영입하여 플레이를 교정해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나달은 인터뷰에서 코치진에는 문제가 없고, 현재 부진의 원인은 자신 스스로에게 있다고 단언했다.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그렇게 말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안다. 결국 본인의 자신감이 문제라는 것 말이다. 오히려 그 인터뷰를 보는 내가 너무 괴로웠다.
나달의 경기를 보면 그런 느낌을 그대로 갖고 응원한다. 공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고, 실수라도 나오면, 짜증과 안타까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보이는 게 멀리서 시청하는 내게도 보인다. 이기는 것도 뭔가 불안하다. 하위 랭커들과의 경기조차도 불안하다. 왠지 이길 것 같지가 않다. 또다시 이변의 희생양이 될것만 같다. 그러다 겨우 이기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 삶을 그의 삶과 동화시키기 까지 한다. 화려하고 자신감 넘쳤던 과거를 뒤로하고,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투쟁하는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왠지 그의 커리어가 내 삶과 동일하게 느껴져 더욱 동질감을 갖고 응원하게 된다.
나달이 정말 오랜만에 몬테카를로와 바르셀로나를 우승했을 때는 더없이 기뻤다. 친구 중 한 명은 요즘도 회자하곤 한다. 아침 출근을 위해 나왔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붙잡고 아침부터 정말 병신처럼 질질 짰다. 그냥 나달이 해낸 게 너무 기쁘다고 말이다. 정말 힘들게 공 하나 하나를 받아 넘겼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니시코리 케이와의 경기에서 나달은 정말 온몸을 쥐어짜서 경기한 것 같았다. 이건 끝났다 싶은 공을 나달은 정말 힘들게 달려가서 겨우 받아냈다. 다음 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포인트 한포인트 얻었고 결국 우승했다. 바르셀로나 오픈은 고작 500대회였다. 그럼에도 나달은 그랜드슬램 우승이라도 한 마냥 기뻐했다. 오랜만에 나온 연승이어서 그럴 것이다. 정말로 이제는 다시 부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침부터 친구를 붙잡고 흐느꼈다. 그냥 나달이 정말 애쓰고 있구나, 정말 다시 해내기 위해서 힘든데도 노력하고 있구나, 그리고 결국 해냈구나. 테니스가 잘 안 된다고 궁시렁대고, 공부가 안된다고 푸념만 늘어놓는 내 자신을 자책하며, 나달처럼 화이팅해야지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날 그렇게 불어터진 눈으로 오전 테니스를 치러갔던 나는 삶에서 손꼽을 만한 플레이를 해냈다. 친구는 그 얘기를 회자하면 미친듯이 웃곤한다. 별 미친 놈이 나달이 우승했다고 아침부터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마냥 미친듯이 흐느꼈다는 것이다. 어쨌건 나는 그랬다. 진심이다.
프랑스 오픈 1, 2회전 승리를 뒤로 하고 그는 리타이어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손목 부상이라는 것이다. 조코비치가 롤랑가로스를 드디어 우승한 지금, 이제 나달은 클레이의 제왕 자리에서도 물러나야할 판이 된 듯하다. 그렇게 그는 윔블던도 지나쳤다. 그리고 또다시 재활 끝에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말했듯, 올림픽은 또 조코비치가 우승할 것 같다. 나달은 4강만 가도 대단한 대회를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4강이나 갈까 싶다. 게다가 리우 올림픽 테니스 코트장은 하드 코트다. 보나마나 조코비치가 우승하겠지. 그래도 나달의 경기를 꼭 챙겨보려고 한다. 팬인 내가 봐도 안쓰러울 정도인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오죽할까. 혹시나 나달이 우승하면 내가 나이키에서 아무거나 고르는 대로 사줄거라고 친구들에게 공언했다. 이에 친구는 "아냐, 됐고, 그냥 치킨이나 사라. 어차피 조코뱅크가 우승하겠지." 라고 말했다.
2013년 조코비치와의 US OPEN 결승 중 찬스 상황에서
다리가 풀려 뒤로 자빠지는 와중에도 공을 노려보고 있는 나달
이 상황 직후 세트스코어 1:1, 3세트 게임스코어 4:4,
나달 서비스게임 0:40 에서 거짓말처럼 게임을 역전하고,
다음 조코비치의 서브를 브레이크 하면서그대로 3세트를 가져가
사실상 승패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나달은 또 질 것 같다. 게다가 그가 강한 클레이 시즌도 끝났다. 하드코트에는 최강인 조코비치가 있고, 머레이도 클레이에서 자신감을 얻으며 상승세중이다. 페더러도 비록 무릎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지만 내년에도 여전히 대단할 것 같다. 이 밖에도 니시코리 케이나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 올해 급상승한 밀로시 랴오니치나 클레이 원백핸드 신예 도미닉 티엠 등도 눈여겨볼만하다. 나달의 아슬아슬한 경기력이라면, 앞으로 해낼 수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처럼 지난 과거의 플레이 스타일이 현재 끊임없이 부상이라는 방식으로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혹자는 같은 방어형이지만 나달의 부진과 조코비치의 득세의 차이룰 조코비치는 안되는 볼을 과감하게 보냈고, 나달은 그것마저 지나치게 쫓아가서라고도 말했다. 참 웃기는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달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인 플레이스타일로써 경기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믿으면 여전히 기회는 온다고 믿는 듯하다. 딱히 동기부여도 없는 올림픽도 출전한다는 걸 보니, 그냥 자신만의 경기를 하려는 것 같다. 그저 끊임없이 도전해서 자신을 증명하고, 좌절하더라도 또다시 도전하려는 듯 하다. 어차피 이제 도전조차 할 수 없는 날은 오겠지. 그때까지 끊임없이 또 재활하고 복귀하고 재기하고자 노력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런 모습에 더욱 애정을 느끼고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나의 삶조차 그럴 것이고 그래야 할 것이라고 믿기에 더욱 그렇다. 바로 그러한 면에서 나달은 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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