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즌의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인 US오픈이 막을 내렸다. 대회 전부터 이래저래 여러 말들이 많았던 US오픈은 수많은 이변을 양산한 끝에 결국 1번 시드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통산 3번째 우승으로 끝이 났다. 이로서 올 시즌 네 번의 그랜드슬램 대회 중 호주오픈과 윔블던은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롤랑가로스와 US오픈은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이 각각 가져가며 마치 10년 전으로 돌아간듯한 모습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랜드슬램을 페더러와 나달이 양분한 것은 2010년 이후로 처음이며, 4개의 그랜드슬램대회를 각각 두 개씩 가져간 것은 최초이다. (2006, 2007년에는 페더러가 3개, 나달이 1개(롤랑가로스)를 우승했고, 2010년에는 나달이 3개, 페더러가 1개(호주오픈)을 우승했다.)
불참absence
이번 US 오픈은 시작 전부터 톱시드 선수들의 불참이 예고되었다. 윔블던 이후로 아예 올 시즌을 접은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를 시작으로, 디펜딩 챔피언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Stanislas Wawrinka도 부상을 호소하며 시즌을 접었다. 올 시즌 내내 헤메던 니시코리 케이Kei Nishikori도 결국 시즌 리타이어로 불참, 지난해 윔블던 파이널리스트 밀로스 랴오니치Milos Raonic도 불참을 선언했다. 여기에 윔블던 이후 골반 쪽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던 세계랭킹 2위 앤디 머레이Andy Murray는 벽치기 영상을 공개하며 US오픈은 참여할 수 있을 거라고 공언하였지만, 결국은 대회 시작 직전에 기권을 선언하여 대진표를 개떡으로 만들어놨다.
나란히 US오픈에 불참한 조코비치와 머레이
출처: firstpost.com
안그래도 각종 이변이 많기로 유명한 US 오픈에서 이렇게 이미 탑 11위 이내 5명의 선수가 불참을 선언하며 대회는 시작 전부터 뭔가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올 시즌 부활로 각자 상승세를 타고 있는 페더러와 나달이 US오픈에서의 첫 대결이자 결승 맞대결을 벌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2번 시드 앤디 머레이가 대진 추첨 후까지 기권타이밍을 끌고가는 바람에 1번시드 나달과 3번시드 페더러가 상위 드로에 함께 배정되어 결국은 준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개떡같은 대진이 되고 말았다.
드로draw
페더러와 나달이 함께 있는 상위드로는 그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 외에도 하위 드로에 비해 무게감이 더했다. 지난 윔블던 세미 파이널리스트인 토마스 베르디흐Tomas Berdych, 부상에 시달렸지만 빅4를 강력하게 위협하며 지난해 화려하게 부활한 후안 마틴 델 포트로Juan Martin del Potro, 올 시즌 최강 페더러를 가장 무섭게 위협했던 닉 키리오스Nick Kyrgios, 나달을 탈락 직전까지 몰았던 호주오픈 세미파이널리스트이자 직전대회인 신시내티 마스터즈 우승자인 그리고르 디미트로프Grigor Dimitrov, 무려 클레이의 나달을 은근 빡세게 괴롭혔던 다비드 고팡David Goffin, 차기 클레이의 제왕 도미니크 티엠Dominic Thiem, 지난해 US 오픈 세미파이널리스트 가엘 몽필스Gael Monfils 등이 상위 드로에 포진되어 있었다. 이중 누구라도 페더러와 나달에게 고추가루를 뿌리며 업셋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들이다.
반면 머레이가 기권한 하위드로는 장단이 선명한 빅서버들의 향연이었다. 윔블던 세미파이널리스트 샘 퀘리Sam Querrey와 장신 듀오이자 알아주는 빅서버 존 이스너John Isner, 윔블던 파이널리스트이자 2014 US 오픈 챔피언 마린 칠리치Marin Cilic, 차기 No.1으로 거론되는 알렉산더 즈베레프Alexander Zverev 그리고 프랑스의 유망주 루카 푸일Lucas Pouille. 이정도가 하위드로의 주요 선수들이다. 이마저도 페더러, 나달에 이어 유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즈베레프는 2회전에서 같은 유망주인 보르나 초리치Borna Coric에 일격을 당해 광탈했고, 칠리치는 빅서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3회전에서 170cm의 단신 선수인 디에고 슈와르츠먼Diego Schwartsman에게 털리며 탈락했다. 정현을 가뿐히 밟고 3라운드에 진출했던 존 이스너는 알렉산더 즈베레프의 형인 미샤 즈베레프Mischa Zverev에게 0:3으로 간단히 털리며 대회를 접었다.
아디다스가 티엠마저 버리고 자신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비외른 보리Bjorn Borg 스타일의 줄무늬 아웃핏을 입고 2라운드 광탈한
알렉산더 즈베레프Alexander Zverev
출처: eurosports.com
결국 운빨터진 이변의 하위드로 최종 승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아공 출신 빅서버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과 스페인의 클레이 스페셜리스트 3인방 중 한명인 파블로 카레노 부스타Pablo Carreno Busta가 되었다. 물론 둘다 그랜드슬램 4강이 처음이다. US오픈 코트가 상대적으로 표면이 빠른 하드코트라는 것을 감안하면 203cm의 장신 빅서버인 케빈 앤더슨이 결승 진출자가 될 거라는 것은 딱히 어려운 예상도 아니었다. 게다가 현재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테니스 커리어를 미국에서 보낸 케빈 앤더슨에게 US오픈은 홈이나 다름 없다.
의외로 상위드로도 마냥 그렇게 전쟁터가 되지만은 않았다. 몽필스는 아크로바틱한 스매싱 한 번 보여주고 고팡과의 경기중에 리타이어됐고, 나달의 8강 상대로 유력했던 고팡과 디미트로프는 스무살도 안된 러시아 애송이에게 나란히 스윕당했다. 기대를 모았던 일본의 스기타 유이치Sugita Yuichi와 프랑스의 베테랑 리샤르 가스케Richard Gasquet는 럭키루저 레오나르도 메이에르Leonardo Mayer에게 패하며 탈락했고, 하드코트에서 나달을 괴롭히는 선수인 토마스 베르디흐는 고작 2라운드에서 지금껏 5번 만나 1번밖에 진적이없던 돌고폴로프Alexandr Dolgopolov에게 패하며 돌고폴로프에게 상대전적 2연승을 선사해주며 탈락했다. 덕분에 나달은 4강까지 까다로운 상대 하나 없이 수월하게 드라이브할 수 있었다.
페더러의 드로에서는 페더러와 4라운드에 만날 예정이었던 키르기오스가 "상대가 강하지 않으면 난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쓰레기 같은 멘탈을 선보이며 1라운드에서 광탈한 것을 제외하면, 그나마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페더러는 1라운드에서 프란시스 티아포Frances Tiafoe, 그리고 2라운드의 미카일 유즈니Mikhail Youzhny와의 경기에서 풀세트 접전을 펼치는 꽤나 낯선 모습을 보이며 좌중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티아포가 미국의 유명한 테니스 유망주이긴 하지만, 바로 그 페더러와 5세트 접전을 갈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경기 막판 티아포는 경기를 잡을 찬스까지 있었지만, 경험부족인듯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브레이크 당하며 페더러에게 경기를 내주었다. 유즈니와의 5세트 경기는 더욱 낯설었다. 한손 백핸드를 쓰는 노장 유즈니는 그 어느 면에서도 페더러에게 완벽하게 뒤지는 선수이다. 그는 이미 상대전적도 0:16이었을만큼 페더러가 압도적으로 상대하는 선수다. 그런데 페더러는 1세트를 간단히 딴 뒤 이상하게 2, 3세트를 내주며 풀세트 경기로 갔다. 어쨌건 기량이나 상성이나 멘탈이나 어느 측면에서든 유즈니가 이길 수가 없는 전력이었기에 결국 페더러가 승리하긴 했지만, 두 경기 연속 풀세트경기가 이뤄지면서 많은 이들이 페더러의 우승가능성을 불안하게 보기 시작했다. 로저스컵에서 보였던 등부상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3라운드와 4라운드를 가볍게 3:0으로 완승하면서 역시 페더러와 나달이 준결승에서 맞불을 것으로 보였다.
델포Del-po
페더러와 나달은 이상하게도 US 오픈에서는 단 한번도 대결한 적이 없다. 2016년은 페더러 불참, 2015년은 나달이 4라운드 탈락, 2014년은 나달 불참, 2013년에는 나달과 페더러가 8강에서 만남을 앞두고 있어 드디어 만나는 건가 싶었으나 페더러가 4라운드에서 느닷없이 스페인의 토미 로브레도Tommy Robredo에게 패하면서 불발되었다. 2012년은 나달 불참, 2010년과 2011년에는 페더러가 조코비치에게 준결승에서 연타로 패배하면서 불발됐다. 2009년과 2008년에는 나달이 준결승에서 각각 델 포트로와 앤디 머레이에게 발목잡히며 결승에 오른 페더러를 만나는데 실패했고, 2007년에는 나달이 4라운드에서 다비드 페러David Ferrer에게 지면서 만남이 불발되었다. 2006년에는 QF에서 나달이 유즈니에게 패하면서 못 만났고, 2005년은 3라운드, 2004년은 2라운드에서 나달이 탈락하면서 맞대결이 성사되지 못했다. 참으로 집요하리만큼 그들은 US오픈에서 만큼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는 드디어 페더러와 나달이 US오픈 맞대결 하는건가 싶어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특히 올 초 호주오픈 결승 대결이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경기 내용 또한 풀세트 접전에 페더러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난 덕분에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라켓 면적이 커진 라켓에 이제 완전히 적응한 듯한 페더러가 나달에 대한 백핸드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듯 4연승을 거두면서 그들의 라이벌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기 까지 했다. 이에 US오픈에서 예상되는 그들의 만남은 대단히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것은 비록 결승은 아니었지만,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광속 포핸드 후안 마틴 델 포트로Juan Martin del Potro
출처: usopen.org
그러나 바로 그 때. 페더러와 나달이 나란히 8강까지 순항하며 준결승 대결을 눈 앞에 둔 바로 그 때, 2009년 페더러의 US오픈 6연패를 격하게 좌절시켰던 후안 마틴 델 포트로Juan Martin del Potro가 나타났다. 지난해 올림픽에서 최강 조코비치와 2008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나달을 순서대로 격파했고, 데이비스 컵에서는 당시 세계랭킹 1위 앤디 머레이마저 박살내며 컴백을 제대로 알린 "델포"였다. 올 시즌 딱히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우승을 거둔 적이 있는 US오픈은 델포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장소였다. 이미 페더러를 만나기 전 4라운드에서 부터 그는 감기에 걸렸다면서 차기 클레이의 제왕 티엠을 상대로 1, 2세트를 완전히 내줬지만, 느닷없이 3세트를 압도하고, 4세트 게임스코어 2:5에서 부터 매치 포인트 상황마저 극복해가며 결국 타이브레이크까지 끌고가 4세트를 따낸데 이어 5세트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제대로 역전승을 거뒀다.
나달이 돌풍의 러시아의 애송이 안드레이 루블레프Andrey Rublev를 가뿐하게 3:0으로 스윕하며 4강에 먼저 자리를 잡았고, 이제 페더러만 델 포트로를 제압하면 역사적인 그들의 첫 맞대결이자 2017 US 오픈의 사실상 결승전이 펼쳐질 판이었다.
의외로 경기는 팽팽했다. 델 포트로가 결정적인 순간에 페더러의 US오픈 6연패를 저지하기도 했다지만 여전히 그의 대 페더러 상대전적은 5-16에 불과했다. 페더러의 발리는 이번 US오픈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던데다 페더러의 움직임은 1, 2라운드 때보다 더욱 가벼워보였다. 그러나 델포는 T존을 향해 내려치는 강력한 서브와 차분한 스트로크로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꾸준히 지켜냈고, 단 한 차례 찾아온 브레이크 포인트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한템포 느리지만 정확한 백핸드 다운더 라인은 페더러의 발리 대쉬를 효과적으로 상대했다. 델포는 왼손 손목 수술 이후 슬라이스를 주로 썼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백핸드 드라이브 비중을 늘렸다. 과거처럼 파워넘치게 후려치는 것 보다 백핸드에서만큼은 차분히 공을 넘기는 데 주력했다.
비록 2세트에서는 페더러에게 브레이크를 허용하며 세트를 내주고 말았지만, 델포트로의 정신력은 경기의 분수령이 된 3세트에 빛이 났다. 그는 먼저 브레이크를 뺏어내며 3:1로 앞섰지만, 지친 기색인 그를 상대로 페더러는 기어이 브레이크를 되갚으며 추격했다. 분위기는 페더러쪽으로 간듯했으나 델포는 파워넘치는 서브와 포핸드로 기어이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유지했다.
3세트 타이브레이크 7:6 페더러 리드 상황, 페더러의 서브 앤 발리를 델 포트로는 백핸드 슬라이스로 겨우 넘겨내는 데 성공했다. 페더러가 충분히 발리로 피니쉬 할 수 있는 공을 페더러는 타이밍을 놓쳤는지, 한 걸음 물러서며 바운드를 기다렸다가 백핸드 드라이브로 처리했다. 공을 치는 순간 페더러의 미스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은 베이스라인을 벗어났고, 점수는 원점이 되었다. 델 포트로에게는 찬스가 왔다. 비록 이어진 페더러의 서비스 기회에서 페더러가 서브 포인트를 따내며 앞서나갔지만, 서브권은 델 포트로에게 넘어왔다. 그는 퍼스트서브에 이은 포핸드 3구 플레이로 동점을 만들었다. 듀스코트에서는 여지없이 페더러의 백핸드쪽 T존으로 내려 찍는 서브에 이은 3구 피니쉬를 노렸다. 페더러가 예술적인 포핸드로 델포의 피니쉬샷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델포는 긴장을 놓지 않고 포핸드 발리로 포인트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페더러는 다음 서브 차례에서 퍼스트 서브를 넣는데 성공했으나, 델포의 백핸드가 생각보다 잘들어왔고, 페더러는 마음이 급했는지 백핸드 발리를 멀리 날리고 말았다. 그렇게 델포트로는 힘겹게 3세트를 가져왔다.
3세트 타이브레이크 7:6 페더러 리드 상황, 페더러의 서브 앤 발리를 델 포트로는 백핸드 슬라이스로 겨우 넘겨내는 데 성공했다. 페더러가 충분히 발리로 피니쉬 할 수 있는 공을 페더러는 타이밍을 놓쳤는지, 한 걸음 물러서며 바운드를 기다렸다가 백핸드 드라이브로 처리했다. 공을 치는 순간 페더러의 미스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은 베이스라인을 벗어났고, 점수는 원점이 되었다. 델 포트로에게는 찬스가 왔다. 비록 이어진 페더러의 서비스 기회에서 페더러가 서브 포인트를 따내며 앞서나갔지만, 서브권은 델 포트로에게 넘어왔다. 그는 퍼스트서브에 이은 포핸드 3구 플레이로 동점을 만들었다. 듀스코트에서는 여지없이 페더러의 백핸드쪽 T존으로 내려 찍는 서브에 이은 3구 피니쉬를 노렸다. 페더러가 예술적인 포핸드로 델포의 피니쉬샷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델포는 긴장을 놓지 않고 포핸드 발리로 포인트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페더러는 다음 서브 차례에서 퍼스트 서브를 넣는데 성공했으나, 델포의 백핸드가 생각보다 잘들어왔고, 페더러는 마음이 급했는지 백핸드 발리를 멀리 날리고 말았다. 그렇게 델포트로는 힘겹게 3세트를 가져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어진 4, 5세트에서 델 포트로가 힘겹게 무너지지 않을까 라고 예상했다. 일단 페더러의 몸놀림이 여전히 너무 가벼워보였던 것에 비해, 델 포트로의 처벅처벅 걷는 모양새는 이미 체력이 다 한 듯 했다. 델 포트로가 이렇게 한 세트 힘겹게 따내고 남은 세트들 허망하게 내주며 패배한 기억들도 내게는 선명했다. 델 포트로가 페더러의 체력을 빼는데 성공했으니, 나달을 응원하는 나로서는 델포트로는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쳐보이는 델포트로는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샷들만큼은 정확하고 차분했다. 오히려 빠릿빠릿하게 뛰는 페더러의 에러가 늘었다. 4세트 첫 브레이크인 5번째 게임이자 페더러의 서비스 게임은 그러한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델포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브레이크는 델포의 몫이었다. 페더러의 일방적인 공격은 날카로운 위너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수많은 에러 또한 양산했다. 심지어 마음이 급했는지 스매싱 미스까지 보였다. 그 때까지 언포스드 에러가 한 개도 없던 델포에 비해 페더러는 이미 6개의 언포스드 에러를 기록하고 있었다. 두 번째 브레이크 포인트 상황에서 델포트로는 훌륭한 백핸드 리턴을 보여줬고, 발리 대쉬하는 페더러는 리턴이 아웃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 그대로 지나쳤다. 하지만 델포의 리턴은 라인에 들어왔고, 그는 브레이크를 해냈다.
그의 치명적인 실수 2개는 그가 뉴욕에서 짐을 싸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출처:usopen.org
페더러는 계속 마음이 급한 듯 했고, 네트 플레이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페더러의 발목을 잡았다. 델포트로는 무려 세컨 서브에서도 에이스를 만들어낼 정도였고, 그의 무게감 있는 스트록은 발리 대시하는 페더러를 지나치는 패싱샷이 되었다. 델포는 서두르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델포트로 서브게임. 결정적 순간은 30/30 상황이었다. 델포의 세컨 서브를 페더러는 짧게 슬라이스로 넘겼고, 느린 델포는 겨우 달려가 슬라이스로 처리했다. 공은 떴고, 페더러가 브레이크 포인트 찬스를 잡으며 경기가 연장될 판이었다. 이대로 경기가 연장된다면 지친 델포트로는 반드시 질 판이었다. 그 결정적인 포핸드 발리를 페더러는 정말 이상하게도 저멀리 날려버렸다. 모두가 당황할 정도였다. 놓칠리가 없는 발리였다. 페더러가 마음이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델포트로 뒤에 이미 4강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달이 함께 서있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그렇게 델포트로는 매치포인트를 가져왔고, 그는 어렵지 않게 서브에 이은 3구 포핸드 다운더 라인으로 경기를 끝냈다. 델 포트로의 스윙에 공이 임팩트되기도 전에 이미 페더러는 듀스 코트 쪽으로 훨씬 자리를 옮긴 후 였다. 델 포트로는 오픈된 어드 코트로 포핸드를 쉽게 집어넣기만 하면 되었다. 7:5, 3:6, 7:6(8), 6:4. 페더러와 나달의 US 오픈 매치업은 또다시 무산되었고, 델 포트로는 이번 US오픈에서 가장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었다.
라파RAFA
2017 US오픈은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16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으로 끝났다. 그는 지붕이 씌워진 아서애쉬 스타디움의 결승전을 처음으로 뛰었고, 그대로 우승을 해냈다. 이로서 나달은 2010년, 2013년에 이어 세 번째 US 오픈 우승기록을 세웠고, 네 번의 US오픈 결승 전적을 3승 1패로 만들었다. 올해에만 두 번의 우승을 달성한 나달은 통산 그랜드슬램 우승 횟수를 16회(호주오픈 1회, 롤랑가로스 10회, 윔블던 2회, US오픈 3회)로 늘리며 페더러의 19회를 추격했다. 페더러와 나달은 올해를 거치며 완전히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번에도 빛난 나달의 몬스터 탑스핀 포핸드
출처:usopen.org
앞서 언급하였듯 나달의 대진은 딱히 어려운 대진은 아니었다. 나달을 괴롭힐 수 있는 다수의 탑랭커들이 결장하거나 탈락했다. 특히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가 8강에서 탈락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페더러를 잡고 올라온 델 포트로가 강력한 선수이긴 하나, best of 5set 경기인 그랜드슬램에서 나달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선수는 아니다.
1라운드에서 만난 두산 라요비치Dusan Lajovic나 3라운드에서 만난 레오나르드 메이에르Leonard Mayer가 강력한 서브를 중심으로 플레이하는 선수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신장과 파워는 아무리 하드코트라도 나달을 위협할만한 그것이 되기는 어려웠다. 2라운드의 타로 다니엘Taro Daniel은 상당히 좋은 그라운드 스트로크와 방어력으로 나달에게서 첫 세트를 얻어내기도 했지만, 다니엘의 서브는 그랜드슬램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그는 체력이 엄청나게 약한 선수였다. 대다수의 선수가 1세트 승리 후 경기 승리 비율이 80%에 육박하는데, 다니엘은 고작 20%대에 불과할 정도였다. 여지없이 1세트가 끝난 이후 다니엘은 나달의 샌드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달의 몬스터 탑스핀을 "한 세트"동안 완벽하게 제압한 후
남은 시간동안 완벽하게 샌드백이 된 타로 다니엘Taro Daniel
출처:usopen.org
토마스 베르디흐를 탈락시키며 나달의 4라운드 상대가 된 알렉산드르 돌고폴로프Alexandr Dolgopolov는 나달에게 가뿐하게 패배한 뒤, 인터뷰에서 "자신이 못한 것이지 나달이 잘한 것이 아니다.", "페더러와의 경기와 비교하면 나달과의 경기는 할만하다. 나달과의 경기에는 내가 공격할 기회라도 있지만, 페더러는 아예 그럴만한 기회자체를 주지 않는다.", "나는 나달보다는 페더러의 우승에 돈을 걸겠다."라는 말들을 남겼다. 테니스 선수들은 보통 겸손한 인터뷰를 하기 마련인데, 뭐가 못마땅했는지 그는 테니스 세계의 언어로서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늘어놨다. 실제로 그는 나달과의 경기 중에 엄청나게 많은 에러를 쏟아냈다. 그의 위너는 나달보다 2개 더 많았지만, 언포스드에러는 나달보다 무려 28개나 더 많았다. 돌고폴로프는 원래도 공격을 퍼붓다가 에러로 자멸하곤 하는 선수다. 그 공격이 탑클래스를 상대로 잘 안 먹혀서 문제인 선수다. 그러니 그의 인터뷰는 애처러워 보일 뿐이었다.
디미트로프 혹은 고팡이 올라올 것으로 보였던 나달의 8강은 그 둘을 무실세트로 탈락시킨 러시아 출신 애송이이자 이번 US오픈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었던 안드레이 루블레프Andrey Rublev였다. 나달의 아웃핏을 똑같이 사입으며 테니스를 쳤다는 장신에 깡마른 이 러시아의 신예는 엄청나게 낮고 빠른 강력한 포핸드를 가지고 있다. 디미트로프와 고팡은 이 유망주를 업신여기다가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그의 플랫한 포핸드 다운더라인에 당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는 section 2의 유일한 승자가 되어 8강에 진출했다.
나달은 지난해 4라운드에서 돌풍의 유망주 루카 포일Lucas Pouille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패배했던 기억을 훌륭히 학습했는지, 이번에는 애송이에게 단 한 번의 찬스도 주지 않았다. 루블레프의 빠른 스트로크는 디펜스 테니스의 대명사이자, 랠리 귀신 나달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달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루블레프는 그랜드슬램 8강이 처음인 뉴비답게 긴장했는지 에러를 미친듯이 남발했다. 경기는 고작 1시간 39분 만에 끝났고, 나달은 단 5게임만 내주고 4강 진출을 확정했다.
스페인 언론은 경기 후 루블레프를 Nadal School의 새로운 학생이라고 불렀고,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루블레프에게 나달로부터 레슨 받았다는 경기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도 했다. 어쩌면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루블레프는 여유를 보이며, 자신 또한 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자 큰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인터뷰는 훌륭했으나, 이 드로의 다른 8강 경기가 로저 페더러와 후안 마틴 델 포트로였으니 나달과 루블레프의 8강이 조금은 아쉬운 것도 사실이긴 했다.
RAFA-delpo
나달은 4강에 오르기까지 표면이 빠른 코트로 유명한 US오픈에서 대단히 위협적인 서브를 가진 선수를 사실 상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8강까지 만난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그라운드 스트록 배틀에 중심을 둔 선수들이었지, 샘 퀘리나 존 이스너처럼 위협적인 서브를 보여주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델 포트로와 만나는 4강은 그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198cm의 델포트로는 바로 그 신장을 활용한 강력한 서브를 바탕으로 올 시즌 나달보다 좋은 리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페더러를 꺾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광속 플랫 포핸드는 US오픈의 아이콘과도 같은 것이다. 나달은 인터뷰에서 델포트로가 편안하게 포핸드를 칠 수 있게 해주는 건 죽겠다는 것(You're dead)이나 다름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9년 US오픈 준결승에서 나달을 말그대로 부숴버렸던 델 포트로
출처: tenisportal.cz
올 시즌 주로 1세트에서는 뭔가 몸이 덜풀린 듯한 모습을 보였던 나달은 US오픈에서도 마찬가지로 1세트에는 뭔가 헤메는 모습을 보였다. 타로 다니엘과 레오나르도 메이어에게 빼았긴 세트도 1세트였다. 델포트로와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세트에서 나달의 공격은 정교함과 강력함이 부족했다. 앞서 경기 전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나달은 집요하게 델포트로의 백핸드를 공략했다. 왼손 손목 수술로 약해진 델 포트로의 백핸드를 노리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델 포트로가 백핸드 슬라이스를 쓰기라도 하면, 슬라이스를 돌아서서 포핸드로 휘돌리는 데 귀신인 나달에게는 무조건 찬스볼이었다. 나달로서는 훌륭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경기처럼 1세트는 델 포트로가 6:4로 가져갔다. 나달의 집요한 백핸드 공략은 의외로 나달의 세트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피곤하고 느린 델 포트로는 마치 나달이 백핸드 쪽으로만 공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듯이 움직이지도 않은 채 백핸드로 받아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나달의 탑스핀 포핸드가 거대한 신장의 델 포트로에게 그리 위협이 되지 못했고, 델포는 슬라이스보다는 백핸드 드라이브로 나달의 공을 길게 넘겼다. 그러다 나달의 공이 가운데로 조금이라도 몰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포핸드로 포인트를 따냈다.
여기에 행운까지 겹쳤다. 나달이 경기 전체에서 범한 언포스드 에러의 절반인 10개가 1세트에서만 나왔고, 2-2 나달 서브 상황에서 나달의 백핸드 에러에 이은 브레이크 포인트 찬스에서 델포의 백핸드 리턴은 지난 올림픽 조코비치와의 경기를 상기시키는 듯 네트를 맞고 살짝 넘어가면서 나달의 서비스 게임은 브레이크가 되고 말았다. 이 포인트가 1세트를 결정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행운까지 겹쳤다. 나달이 경기 전체에서 범한 언포스드 에러의 절반인 10개가 1세트에서만 나왔고, 2-2 나달 서브 상황에서 나달의 백핸드 에러에 이은 브레이크 포인트 찬스에서 델포의 백핸드 리턴은 지난 올림픽 조코비치와의 경기를 상기시키는 듯 네트를 맞고 살짝 넘어가면서 나달의 서비스 게임은 브레이크가 되고 말았다. 이 포인트가 1세트를 결정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델 포트로의 선전은 여기까지였다. 2세트는 나달의 베이글 스코어 승리였고, 2, 3, 4세트 통틀어 델포는 단 한 번의 브레이크 포인트 상황도 맞이하지 못했다. 반면 나달은 2세트에만 3번을 비롯해, 3세트 1번, 4세트 2번 브레이크를 해내면서 경기를 손쉽게 끝냈다. 전문가들과 시청자들과 심지어 경기를 뛰는 선수들까지 모두 동조한 나달의 승리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바로 나달이 다운더라인을 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좌우를 크게 흔드는 포핸드로 델 포트로를 말 그대로 박살내버린 나달
출처 : usopen.org
나달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델포트로의 포핸드 코트가 자주 오픈되어 있었다는 것을 1세트 후에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델포의 백핸드 쪽에 집중하던 전략을 바꿔 델포의 포핸드 쪽, 즉 자신의 포핸드 다운더라인을 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나달의 생각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델포트로는 독감, 티엠과의 풀세트, 페더러와의 접전을 거쳐온 상태였다. 그의 무릎이 결코 정상일리가 없었다. 실제 그의 풋워크는 대단히 둔했다. 키가 워낙에 컸고, 침착한 성격과 팔로 휘두르는 스윙 동작 탓에 그렇게 티는 안났지만, 그의 풋워크는 확실히 약점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나달은 자신의 포핸드 스트록 궤적을 좌우로 벌리기 시작했고, 델포는 확실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2세트 베이글 스코어는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1세트 이후 몸이 다 풀린 나달의 채찍과도 같은 포핸드 다운더라인을 델포가 쫓아가서 쳐낸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였다. 그 역시 자신의 백핸드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세트와 4세트의 델포는 물오른 나달에게 털리는 평범한 베이스라인 러너의 모습으로 절하되었다. 페더러-델포트로의 경기와는 달리 나달-델포트로의 경기는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나달의 강력함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마치 롤랑가로스 때의 나달을 보는 듯 했다. 나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보여줬다. 돌풍의 주인공 루블레프에 이어 또다른 돌풍의 주인공인 델포트로 또한 거대한 나달의 벽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나달의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하위 드로가 워낙 개판이었기에 이 경기 승리자는 사실상 우승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Final
이번 US오픈에서 나달은 서브와 리턴에서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다. 먼저 누구와 경기를 하든 퍼스트서브 리턴을 베이스라인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거의 라인즈맨 근처에서 준비했다. 4강 델포트로와의 경기 그리고 결승 케빈 앤더슨과의 경기에서는 그것이 더욱 돋보였다. 퍼스트 서브 리턴 상황에서도 리턴 준비를 베이스라인에 붙어서 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나달이 관중석에 바짝 붙어 받아낸 리턴은 꽤나 잘들어갔다. 서브 리턴시 스윙을 짧게 하는 일반적인 선수들과 달리 나달은 리턴에서도 거의 풀스윙에 가까운 스윙을 했다. 러닝상황에서 힘들게 받아낸 공들도 어떻게든 들어갔고, 지난 윔블던의 잔디 표면에 비하면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믿는 마냥 그는 리턴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물론 그렇게 랠리가 시작되면 상대는 조코비치나 페더러가 아닌 한 허망하게 나달에게 당하게 된다. 게다가 이번 US오픈 코트, 특히 메인 코트인 아서 애쉬 스타디움의 코트 표면이 다른 때에 비해 유난히 느려진 것 같다고 의심 받는 상황에서는 나달에게 더욱 힘이 실렸다.
거의 관중석에 붙어있는 것 같은 나달의 리턴 포지션
출처: eurosport, espn
또 하나는 그의 퍼스트 서브 성공률이 눈에 띄게 높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의 서브는 200km/h에 달하는 빠른 서브보다는 퍼스트 서브 성공률에 집중되었다. 그의 퍼스트 서브 성공률은 대회 전체를 통틀어 70% 전후로 상당히 높았다. 여기에 퍼스트 서브 득점률 또한 70% 이상을 보이며 브레이크 포인트 상황을 자주내주지 않으며 자신의 서브게임을 리딩했다. 최상위 선수치고 브레이크를 정말 쉽게 잘 당하는 그 나달이 이번 US오픈에서는 자신의 서비스 게임에서 리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델 포트로로 부터 강력한 서브를 겪은 나달에게 28번시드이자 세계랭킹 32위인 빅서버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결코 나달에게 위협적인 적이 되지 못했다. 결승에 이르러 나달의 승리에 대한 베팅수익률은 1에 수렴하는 것을 넘어 마이너스를 향할 정도였다.
머레이가 빠지면서 개짝이 된 하위 드로는 결국 수많은 중간급 랭커들의 다툼 끝에 케빈 앤더슨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앤더슨은 같은 빅서버 샘 퀘리를 상대로 조금 고전한 것 빼면 큰 어려움 없이 올라왔다. 부상으로 한동안 쉬면서 랭킹이 떨어졌지만, 2년 전만 해도 탑20 이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203cm의 키로 타점 높은 서브를 내리 꽃으며, 상대적으로 마르고 가벼운 몸으로 날카로운 스트로크를 치는 전형적인 미국형 선수였다. 약점이라면, 대다수의 빅서버들이 그렇듯, 서브가 안들어가기 시작되면 경기력은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마냥 세게 플랫한 타구들을 때려대니 에러로 자멸한다. 스윙 동작도 크고 풋워크의 유연성이 부족해 방어력도 부족하다. 어쨌건 앤더슨은 하위드로를 정리했고, 보급형 클레이스페셜리스트인 카레노 부스타를 어렵지 않게 4강에서 물리치고 생애 최초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은 커녕 4강도 처음이었던 그는 이미 4강 승리 후 셀레브레이션을 다해서 결승이 딱히 치열한 경기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세계랭킹 32위에서 한방에 세계랭킹 15위, Race to London 11위로 뛰어오른 케빈 앤더슨
출처: atpworldtour.com
역시나 예상대로 앤더슨은 물오른 나달을 상대로 단 한 번의 브레이크 포인트 찬스도 얻어내지 못한 채 브레이크만 4번 내주며 경기를 접었다. 6:3, 6:3, 6:4. 앤더슨의 서브는 에이스를 10개나 기록했지만, 경기를 좌우하지 못했다. 게다가 앤더슨은 열심히 뛰었지만, 그는 에러가 너무 많았고,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스트록은 약간씩 라인을 벗어났다. 반면 나달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브레이크 한 번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지켰다. 나달의 퍼스트서브 승률은 84%, 세컨 서브 승률은 70%에 달했다. 빅서버인 앤더슨의 퍼스트 서브 승률이 73%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달의 서브게임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앤더슨의 세컨 서브 승률은 36%로 나달의 리턴 승률(42%)보다 낮았다. 그렇게 나달은 상대전적을 5-0으로 만들며 그의 세번째 US오픈 우승컵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는 부상에서 컴백한 앤더슨을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고, 케빈 앤더슨은 자신보다 16일 어린 나달을 테니스의 역사로 존중했다.
Passing Federer?
나달이 US오픈을 우승하자, 오만 군데서 나달이 페더러의 그랜드슬램 기록을 앞지를 것이라고 설레발치고 있다. 해외의 여러 테니스 레전드들부터가 그런 실 없는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다. 내년 내후년 롤랑가로스도 당연히 라파가 우승할 것이고, 페더러를 보듯이 라파 또한 큰 부상만 아니면 선수 생활을 향후 몇년은 더 충분히 강력하게 해낼 거라는 것이다. 전 그랜드슬램 챔피언 메츠 빌랜더Mats Wilander가 한 말이다. 국내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이야기들을 볼 때마다 뭔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오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달은 끝났다고 지껄이던 인간들이다. 조코비치가 얼마나 많은 기록들을 갈아치울지만 생각했던 세계다. 저런 이야기들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페더러와 나달이 올해의 성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는지 그새 다 쳐 까먹은 것인가.
페더러가 그 나이에도 대활약한다고 해서, 다른 선수들도 모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페더러는 테니스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단히 특별한 선수이고, 그는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특히 나이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을 대단히 변화시켜왔다. 그의 니트한 플레이는 결코 공짜로 이뤄진 게 아니다. 반면 나달의 플레이 스타일이 나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다는 건, 나달이 올시즌 잘했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달이 네트 피니쉬를 늘렸고, 보다 공격적으로 플레이한다고 하지만, 페더러의 플레이스타일에 비하면 여전히 체력 등 신체능력에 기초한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조코비치가 롱런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적이다.
페더러보다 1살 어린 선수이자 한때 페더러의 라이벌이었으며,
페더러보다 먼저 세계랭킹 1위를 경험한 미국의 테니스스타 앤디 로딕Andy Roddick.
그는 이미 2012년 US오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올해 7월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결코 그가 코트장을 빨리 떠난게 아니다. 페더러가 이상한 것일 뿐.
출처:foxnews.com
올 시즌을 페더러와 나달이 그랜드슬램을 양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동시에 조코비치가 그렇게 처절하게 하락할 것이라는 것 또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나달이 내년에도 올해처럼 대단한 활약을 펼칠 것이고, 페더러의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것 또한 매우 틀리기 쉬운 예측에 불과하다. 그랜드슬램 우승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그 "전문가"들이 가장 잘알고 있지 않은가. 나달의 US오픈 우승은 2014년 이후 무려 3년만의 하드코트 타이틀이었고, 이번 우승에는 나달의 선전도 있었지만, 조코비치와 머레이의 부진과 페더러의 탈락이라는 강력한 배경요인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이제 남은 시즌은 나달이 가장 취약한 인도어 하드 시즌이다. 나달은 또다시 패배를 맛볼 것이고 이는 내년 시즌에 있어서도 그리 좋지 않을 영향을 끼칠만한 조건이다. 나달이 페더러를 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페더러가 메이저 20승을 달성할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적이다.
This Season
어쨌든 이번 시즌은 대단히 특별한 해다. 로저 페더러는 2012년 이후 5년여만에 드디어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했고, 라파엘 나달은 최악의 부진을 기어이 극복하고 또다시 클레이의 제왕에 올랐다. 절대 무적으로 보였던 노박 조코비치는 자신이 최악의 슬럼프에 있다는 것을 올시즌 확실히 입증했다. 앤디 머레이는 세계랭킹 1위의 면모에 여전히 부족한 선수라는 것을 보였고, 스탄 더 맨은 호주 오픈 4강, 인디언웰스 준우승, 롤랑가로스 준우승 등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그가 상대한 페더러와 나달은 조코비치가 아니었다.
시즌 오프를 발표하는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 자다 일어난 듯한 그의 헤어스타일처럼
그는 기대와 달리 올시즌을 완전히 망쳤다. 그가 사라진 투어는 새로운 페더러-나달의 시대를 맞이했다.
출처:novakdjokovic.com
페더러는 그 나이에도 최상위수준의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천적인 나달을 상대로 3연승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페더러가 나달에게 상대전적에 있어 대단히 밀린 것은 그들의 경기가 클레이에서 주로 이뤄졌고, 페더러는 나달에게 클레이에서 만큼은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웃도어 하드코트에서도 페더러는 올시즌 전까지 2승 8패를 기록할 만큼 나달에게 약했다. 하지만 올시즌 3번 열린 그들의 아웃도어 하드코트 경기는 전부 페더러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서 인도어 하드코트를 쓰는 2015년 바젤 오픈 결승의 승리까지 포함하여 페더러는 나달을 상대로 첫 3연승과 첫 4연승을 기록했다. 나달에 대한 백핸드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듯 했다. 호주오픈 결승전은 멘탈대결에서 페더러가 이긴 것이었다면, 인디언 웰스와 마이애미는 기량면에서 페더러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경기였다. 인디언 웰스와 마이애미가 하드코트 대회 중에서도 유난히 느린 코트로 유명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결과이다.
올 시즌을 나란이 나눠드신 두 분.
페더러는 나달을 완벽하게 제압하며, 그의 마이애미 마스터즈 우승을 또다시 좌절시켰다.
출처:news.com
남은 인도어 하드시즌 결과에 따라 나달이 Year end No.1이 될지, 페더러가 Year end No.1이 될지 결정될 것이다. 페더러가 US오픈에서 일찍 탈락하면서, 그 둘 간의 랭킹포인트차는 거의 2000여 포인트에 가깝게 벌어졌지만, 인도어에 약한 나달이 남은 대회에 부진하고, 인도어에서 강한 페더러가 남은 대회에서 선전한다면, 차이가 금방 좁혀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상하이와 파리 마스터즈 우승 포인트만도 각각 1000포인트이고, 투어파이널은 1500포인트이다. 나달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여전히 페더러는 매우 강하다. 그는 델 포트로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올시즌 남은 일정에 대해 밝혔다. 인도어 하드는 잔디와 함께 페더러가 지배하는 코트다. 게다가 올시즌에는 인도어하드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조코비치도 없다. 나달 트라우마를 이미 아웃도어 하드에서 극복해 낸 페더러에게 인도어 하드의 나달은 그리 큰 장애물이 아니다. 인도어에서 페더러가 나달에게 패배한 건, 그들의 6번의 맞대결 중 나달이 북미하드시리즈에서 자신감을 채웠던 2013년 월드투어파이널 단 1번에 불과하다. 따라서 페더러가 체력적인 부분만 잘 관리해 낸다면 하반기 인도어 시즌은 그의 독보적인 무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리는 월드 투어 파이널.
이번에는 스폰서가 바뀌어서 바클레이즈 파이널에서 니토Nitto 파이널로 명칭이 바뀌었다.
과연 나달은 월드 투어 파이널 첫 우승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출처:atpworldtour.com
Season End
신시내티와 로저스컵에서의 허망한 탈락에도 불구하고 달성해낸 나달의 US오픈 우승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달의 팬이 된 이후 그가 한 해 동안 그랜드슬램 결승에 오른 것을 세 번이나 보고, 그 중 두 번이나 우승하는 것을 라이브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신나는 일이었다. 이제 그가 남은 인도어 시즌을 잘 마무리해서 첫 월드 투어 파이널 우승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대단히 확률낮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가 만약 월드투어파이널을 우승한다면 그건 페더러가 부상당하거나, 세미 파이널에서 느닷없이 탈락하는 경우 정도 뿐일 것이어도 말이다.
이제 올 시즌도 끝나가고 있다. 사실 남은 인도어 시즌보다 과연 내년 시즌이 어떻게 될지가 더 궁금하다. 과연 나달이 내년에도 좋은 성적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 내년에도 클레이를 평정할 수 있을지 말이다. 황제 또한 여전히 최상위에서 경쟁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멘탈로 시즌 오프한 조코비치도 내년 초에는 돌아올 것이고, 앤디 머레이도 곧 부상에서 돌아올 것이다. 5인자 스탄더맨도 내년에는 돌아올 것이고, 니시코리와 라오니치도 그렇다. 여기에 올 시즌 선전한 디미트로프, 칠리치, 이스너, 퀘리 그리고 US오픈 파이널리스트 케빈 앤더슨은 물론, 대단히 성장한 유망주들인 티엠, 즈베레프, 루블레프, 샤포발로프 등도 여전하다. 과연 이들이 모두 모일 내년 시즌에는 또 어떤 결과들이 나올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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