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특수화의 끝은 느슨한 죽음 뿐


토쿠사

: 소좌,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나같은 남자를 본청에서 빼온거죠?


쿠사나기 소좌

: 네가 그런 남자이기 때문이야. 부정규 활동 경험이 없는 형사 출신에 더구나 기혼. 전뇌화하기는 했어도 뇌는 잔뜩 남아 있고 거의 생 몸. 전투단위로서 아무리 우수해도 같은 규격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은 어딘가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게 되지. 조직도 사람도 특수화의 끝에 있는 건 느슨한 죽음 뿐 그것 뿐이야. 



『The Ghost in the Shell』 중에서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잠언인<너 자신을 알라>는 사실 <너 자신이 병신임을 알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인 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어려운 거지. 찾는 거는 ‘나’인데 자꾸 병신만 보이니까 내가 아닌 거 같거든.”


더 딴지 - 읽은 척 매뉴얼 <데미안>



You don't see what I mean at all.


  "You ought to go to a boys' school sometime. Try it sometime," I said. " It's full of phonies, and all you do is study so that you can learn enough to be smart enough to be able to buy a goddam Cadillac some day, and you have to keep making believe you give a damn if the football team loses, and all you do is talk about girls and liquor and sex all day, and everybody sticks together in these dirty little goddam cliques. The guys that are on the basketball team stick together, the Catholics stick together, the goddam intellectuals stick together, the guys that play bridge stick together. Even the guys that belong to the goddam Book-of-the-Month Club stick together. If you try to have a little intelligent-"...


... I said no, there wouldn't be marvelous places to go to after I went to college and all. Open your ears. It'd be entirely different. We'd have to go downstairs in elevators with suitcases and stuff. We'd have to phone up every-body and tell'em good-by and send'em postcards from hotels and all. And I'd be working in some office, making a lot of dough, and riding to work in cabs and Madison Avenue buses, and reading news papers, and playing bridge all the time, and going to the movies and seeing a lot of stupid shorts and coming attractions and newsreels. Newsreels. Christ almighty. There's always a dumb horse race, and some dame breaking a bottle over a ship, and some chimpanzee riding a goddam bicycle with pants on. It wouldn't be the same at all. You don't see what I mean at all."


J. D. Salinger,『The Catcher in the Rye』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하자고 친구를 불러냈다. 진토닉이 마시고 싶다며 칵테일 바에서 한 잔 한 뒤, 바로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별히 근황을 물을 것도 없었다. 항상 그러던 대로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채웠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술을 먹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술을 멀리하는 얼마나 건강한 생활을 누렸는지를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번 달 초에 글 쓰는 친구를 만나는 김에 맥주를 마셨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최근 얼마나 꾸준히 구보를 뛰었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침 공기를 마시는 상쾌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구보를 뛰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그저께 부터 추워졌다고 뛰지 않았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최근 내가 다시 얼마나 웨이트를 꾸준히 하는지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건강한 신체 단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시작한 지 2주나 됐는지 모르겠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독서와 공부에 몰입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보다 정교한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얼마나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읽는 척을 해온지 한 달도 안된 것 같다. 

  무언가 열심히해왔다고 대단히 착각하게 되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려 찾아오는 것 같지 않다. 그 만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러한 꾸준함을 끊임없이 이어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어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까?


  친한 형님과 부대찌개를 저녁으로 먹은 날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벤치에 앉은 담배 연기 속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르던 중, "어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까?"라는 주제가 나왔다. 나는 농담과 과장을 섞어가며 몇 가지 조건을 만들어 형님께 보여드렸다. 


  1.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
     i) 술, 담배를 멀리한다. 특히 술을 즐기지 않는다. 
     ii) 복잡한 유흥가 혹은 시가지를 꺼려한다. 

  2. Facebook을 사용하지 않는다. 
     i) 계정만 있을 뿐, 특별한 활동이 없는 것은 예외로 한다.
     ii) 프로필 사진은 게재되지 않은 것을 최고로 치며, 풍경, 정물 등을 차선으로 친다.

  3.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다. 
     i) 사용한다 하더라도 프로필 사진, 상태메시지, 카카오스토리가 없다. 
     ii) 개인적인 용도의 채팅 갯수가 100개를 넘지 않는다. 
     iii) 피처폰을 사용하는 사람은 최상으로 본다. 

  4. 셀카를 찍지 않는다. 
     i) 찍더라도 개인적으로 소장 할 뿐 여기저기 게재하지 않는다. 
     ii) 공공장소에서 시도하지 않는다. 

  5. 각종 비속어 사용이 없다. 

  6. 자신만의 확고한 커리어와 목표가 있다.

  7. 다른 모든 모든 조건을 합한 것 보다 6번 조건이 우월하다.


  완전히 웃기는 기준이다. 형님은 이 조건을 듣고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형님은 내게 그거 참 말이 된다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런 게 어딧냐고 소리치셨다. 자기는 술, 담배도 즐기고, 카카오톡도 사용하는데 그럼 안 되는 거냐고 형님은 내게 따졌다. 그래서 나는 천연덕스럽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형님, 세상에 절대적으로 맞는 기준 같은 건 없어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기준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죠."

  그렇게 담배연기 속에서 낄낄거리며 형님은 내게 "그런 여자"를 만날 수나 있겠냐고 허심탄회하게 내리쉬었다. 나는 태연자약하게 마지막 한 타를 날렸다.

 "형님. 그런 여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근데 절대 만날 수 없을 거에요. 왜냐면, 그런 여자들은 전부 안 이쁘거든요."




  그 말을 담배연기 속에 날리고는 형님과 나는 다시 한 번 마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그렇게 낄낄거리는 담배연기와 함께 하루를 저물었다.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쥐가 사람을 잡는가. 사람이 쥐를 잡는가.


  쥐 덫 박스에 있는 사용방법을 읽었다. "본 트랩은 쥐의 좁은 시야와, 항상 벽에 접근하여 달리려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유리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좁은 시야와 벽에만 붙어서 달리는 건 비단 쥐 뿐만이 다닐텐데 말이다. 쥐 덫에 걸리는 쥐와 쥐 덫을 놓는 나는 어디서 갈라지는 것일까 궁금했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다.


  훈련소 시절이었다. 훈련소에서는 훈련병들에 대한 통제가 굉장히 엄격하다. 모든 시간을 통제했고, 모든 행동을 통제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서 긴장하고 있는 훈련병들은 그 긴장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수 백명은 족히 될 만한 많은 숫자의 훈련병들을 하나처럼 통제하려다보니 조교들은 전부 호랑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대식 예절을 처음으로 배우던 시절이다 보니 모든 것을 FM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훈련병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대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때때로 조교들은 훈련병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로 화장실 사용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건 정말 고문이었다.
  막사에서 대기하는 때가 가장 문제였다. 훈련병들은 아직 군대의 체계에 익숙치 않기 때문에 항상 긴장 상태에서 대기한다. 바로 이런 때에 화장실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이런 때에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텅 빈 복도를 혼자서 지나, 공포 그 자체인 조교에게,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냐는 것을 골자로 한 족히 일곱 문장은 될 만한 대본을 통째로 외워 가야했다. 대본에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완벽할 때까지 조교한테 욕을 얻어 들으며 반복 재생을 해야했고, 그 와중에 모든 훈련병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시선도 견뎌야 했다. 물론 화장실에 있는 동안 "집합"이 걸리는 리스크 또한 순전히 본인 몫이다. 
  그래서 항상 훈련병들은 화장실을 가는 일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했다. 작은 일이면 몰라도, 특히나 큰 일이면 정말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손에 쥔 화장지는 의도된 용도(?)보다, 이마의 땀을 닦는데 더 요기났다. 조소가 섞인 조언, 진심이 담긴 조언, 아무 생각 없는 조언 등 주변 훈련병들의 수 많은 조언들이 쓰나미처럼 귓속으로 몰아친다. 머릿 속은 더욱 패닉이 되어간다. 일 중에 "집합"이 걸려서 당황할 모습, "대본"이 틀려서 흘려올 식은땀들, 엄청난 조소와 폭언을 들으며 풀밭으로 뛰어갈 일들, 훈련 도중에 옷에 지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인생에서 손 꼽을 만한 멋진 문장을 들었을 때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같은 내무실의 내 건너편에 있던 훈련병이 바로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우리는 전투복과 전투화를 갖춰신고 내무실 침상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화장지가 서서히 적셔져 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훈련병들은 녀석에게 온갖 정보와 분석을 바탕으로 쓸데없는 조언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바로 내 뒷 번호를 가진,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한 마디 외쳤다. "야,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제일 빠른 때여~". 그 말을 듣고는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서로 그 말을 따라하기 바빴다. 결국 화장지를 들고 있던 녀석은 재빨리 뛰어나갔고, 집합이 되기 전에 무사히 귀환했다. 녀석은 시원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밖에 모르던, 뭔가 솔직한 정겨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녀석의 그 말은 내게 단지 화장실에 가는 것에 관한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삶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두려움에 맞부딪히게 된다. "늦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한 두려움의 대표적인 표상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녀석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이 때"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 중 항상 가장 빠른 시기다. 아무 것도 늦은 것은 없다. 시작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적극성이나 실천성이 유난히도 모자란 나는 요즘도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녀석의 말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이 항상 가장 빠른 시기일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