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다.


  훈련소 시절이었다. 훈련소에서는 훈련병들에 대한 통제가 굉장히 엄격하다. 모든 시간을 통제했고, 모든 행동을 통제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서 긴장하고 있는 훈련병들은 그 긴장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수 백명은 족히 될 만한 많은 숫자의 훈련병들을 하나처럼 통제하려다보니 조교들은 전부 호랑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대식 예절을 처음으로 배우던 시절이다 보니 모든 것을 FM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훈련병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대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때때로 조교들은 훈련병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로 화장실 사용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건 정말 고문이었다.
  막사에서 대기하는 때가 가장 문제였다. 훈련병들은 아직 군대의 체계에 익숙치 않기 때문에 항상 긴장 상태에서 대기한다. 바로 이런 때에 화장실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이런 때에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텅 빈 복도를 혼자서 지나, 공포 그 자체인 조교에게,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냐는 것을 골자로 한 족히 일곱 문장은 될 만한 대본을 통째로 외워 가야했다. 대본에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완벽할 때까지 조교한테 욕을 얻어 들으며 반복 재생을 해야했고, 그 와중에 모든 훈련병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시선도 견뎌야 했다. 물론 화장실에 있는 동안 "집합"이 걸리는 리스크 또한 순전히 본인 몫이다. 
  그래서 항상 훈련병들은 화장실을 가는 일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했다. 작은 일이면 몰라도, 특히나 큰 일이면 정말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손에 쥔 화장지는 의도된 용도(?)보다, 이마의 땀을 닦는데 더 요기났다. 조소가 섞인 조언, 진심이 담긴 조언, 아무 생각 없는 조언 등 주변 훈련병들의 수 많은 조언들이 쓰나미처럼 귓속으로 몰아친다. 머릿 속은 더욱 패닉이 되어간다. 일 중에 "집합"이 걸려서 당황할 모습, "대본"이 틀려서 흘려올 식은땀들, 엄청난 조소와 폭언을 들으며 풀밭으로 뛰어갈 일들, 훈련 도중에 옷에 지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인생에서 손 꼽을 만한 멋진 문장을 들었을 때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같은 내무실의 내 건너편에 있던 훈련병이 바로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우리는 전투복과 전투화를 갖춰신고 내무실 침상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화장지가 서서히 적셔져 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훈련병들은 녀석에게 온갖 정보와 분석을 바탕으로 쓸데없는 조언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바로 내 뒷 번호를 가진,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한 마디 외쳤다. "야,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제일 빠른 때여~". 그 말을 듣고는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서로 그 말을 따라하기 바빴다. 결국 화장지를 들고 있던 녀석은 재빨리 뛰어나갔고, 집합이 되기 전에 무사히 귀환했다. 녀석은 시원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밖에 모르던, 뭔가 솔직한 정겨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녀석의 그 말은 내게 단지 화장실에 가는 것에 관한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삶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두려움에 맞부딪히게 된다. "늦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한 두려움의 대표적인 표상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녀석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이 때"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 중 항상 가장 빠른 시기다. 아무 것도 늦은 것은 없다. 시작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적극성이나 실천성이 유난히도 모자란 나는 요즘도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녀석의 말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이 항상 가장 빠른 시기일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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