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7일 목요일

여기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다.. 심심해서 그래.. 심심하니까..


  유병언 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유병언 씨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시신이 맞다, 아니다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시신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백골화 될 리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유병언 씨의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를 놓고도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혹자는 시신이 유병언 씨의 것으로 조작된 것이며, 이를 통해 여론의 시선을 돌린 후, 박근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유병언 씨는 해외로 이미 도피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후 등장한 유병언 씨의 아들 유대균 씨가 검거 될 당시에는, 유대균 씨가 치킨을 어떤 목소리로 시켰는지가 보도되었고, 그를 따르는 "미모의 수행원"이 검거 당시 엘리베이터에서 왜 미소지었는지가 이슈가 되었다.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국회에서는 날선 공방이 계속되더니 7일 오후,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세월호 관련자들이 대학 입학에 혜택을 받는다거나, 특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라는 것이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것인지가 주요 이슈들이었다. 

  윤 일병이 군대에서 가혹행위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희생자가 죽음을 맞이한 건 3개월에서 4개월 전이지만, 어느 새 갑자기 사건의 잔혹성이 이슈를 장악하고 있고,  "참으면 윤일병, 못참으면 임병장"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군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여기저기 솟구치는 중이다. 야당은 이에 대해 김관진 현 안보실장이자, 전 국방부 장관을 해임하라고 외치고 있는 중이다. 





 토마스 홉스는 자신은 말로 인간을 기만한다면, 당신들은 행동으로 기만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가 무리하게 운항하게 된 원인과 구조활동에서 발생했던 여러가지 혼합된 문제들의 해결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유병언 씨를 법정에 올려봤자 기껏해야 주주들에 대한 횡령, 배임이 주된 처벌이 될 뿐, 세월호의 침몰과 수장된 안타까운 영혼들에 대한 죗값을 직접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무도 관심없다. 애초에 유병언 씨 혼자 스포트라이트에 선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문제는 시스템에 있으며, 시스템에는 수 많은 복합적인 우연적 인과관계들이 겹쳐 있다는 것들도 물론 관심 밖이다. 유병언 씨도 시신으로 발견된 이 마당에 앞으로 또다시 발생하게 될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할 조치들이 어떤 것이 있을지는 여전히 안중에도 없다. 애초에 대화거리도 되지 않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빨리 발을 뺐고, 유병언 씨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제 10년 쯤 후에 다가올 다음 사건을 기다릴 뿐이다. 

  세월호 사건 관련자들의 대다수인 단원고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 혜택을 준다고 한다. 구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그런 무리수로 씻어보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특검을 해서 뭘 어떻게 조지겠다는 건지 야당의 속내도 잘 모르겠다. 새누리당의 말마따나 야당의 공세는 진정으로 희생자와 유가족, 사건의 당사자들을 위한 조치가 아닌, 그저 "정치적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법안 이란 건 사건을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책임자를 식별해내고, 보상을 규정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벌써부터 입학 특례니 하며, 법안에 집착하는 걸 보니, 그저 희생자를 등에 업고, 박근혜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안보인다. 사건에서 있었던 정부의 삽질을 꼬리 떼내고 싶어하는 여당과, 정의의 대리인인양 무리수를 펼치는 야당의 모습만 남아 보인다. 

  유병언 씨와 관련된 음모론들만 펼치던 사람들은 이제 윤 일병을 구타한 선임병들이 얼마나 개새끼인지 이야기하느라 바빠보인다. 뭐 그들이 개새끼가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어린 젊은이들의 숫기가 포텐이 터진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잔혹하게 때려죽였는지가 핵심이다. 얼마나 잔혹하게 괴롭혔는지, 얼마나 안타깝게 죽었는지가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희생당한 것처럼 슬퍼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윤 일병이 그들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야당은 역시나 오늘도 김관진 장관을 비롯한 관련 군 간부들을 모두 매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당은 자신들의 세력에 있는 사람을 비호하기에 바쁘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떠한 배경과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관심없다. 그들이 그 정도까지 윤 일병을 패는 일이 어쩌다 "정상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관심없다. 그저 군대는 지옥이고, 가해자들은 지옥에 있는 개새끼들이어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저 그들에게 이런 일은 드라마고 영화일 뿐이다. 그냥 가해자 비스무리한 새끼들은 다 싸이코패스니까 사회에서 매장되고 감옥에서 썩어야 할 뿐이다.  
  "희생자보다 가해자가 훨씬 많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혹은 당신의 가족이 군대에서 희생자가 되기보단 가해자가 될 확률이 말도 안될 정도로 훨씬 크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마치 학교 폭력 가해자의 부모들이 우리 XX는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 믿는 것 처럼 말이다. 어차피 상관없다. 윤 일병 때린 애들은 내가 모르는 애들이니까 욕해도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성씨를 가진 또다른 윤 일병을 기다릴 뿐이다. 




"다.. 심심해서 그래.. 심심하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다 심심해서 그래.."



2014년 4월 15일 화요일

너만 잘하면 된다


  아무 저항없이 현실에 부지런히 적응해나간다는 비합리성이 개인들에게는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으로 보인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만약 한 대규모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후생을 최대화 하고자 합리적으로 노력한다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거나, 공동이익이나 집단이익의 달성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유인들이 집단 구성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한, 그들은 공동이익이나 집단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멘슈어 올슨, "집단행동의 논리 - 공공재와 집단이론" 중에서


  그 누구에게 묻던지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지나친 경쟁 체제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가?", "그렇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 우리나라의 경쟁 체제에 문제 의식을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교육은 "대입"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대입"이라는 목표는 "취직",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속적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수도권 유수 대학의 정원은 전체 수업생의 10% 남짓이고, 유수 대기업 공채 경쟁률은 평균 57:1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 임원까지 가는 비율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TV 속에는 수 많은 "Winner"들이 나와서 자신이 얼마나 코피터지게 노력해서 이 자리에 올라왔는지를 강변하고, 청자들에게도 바로 자신이 했던 그러한 노력을 요구한다. 데카르트적 인식론 처럼이나, 바로 "너"도 "나"처럼 코피터지게 한다면, "나"와 같은 "Winner"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내가 만약 친구나 동생들의 어려움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난 그들에게 그 "Winner"들이 했던 말과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내가 "Winner"여서는 아니다. 나 또한 그 "Winner"들을 동경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Winner"들이 말하는 가치가 우리가 사는 사회의 근본적 가치가 되어가고 있다고 자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친구, 동생들에게 한 "Winner" 정치인으로 부터 직접 들은 조언을 말해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졌다면, 넌 "잔인"하게 노력해라."라고 말이다. 나는 그러한 조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어떠한 성취를 얻기위해서는 "잔인"하게 노력해야하고,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싶다면, 바로 그 시스템에서 "Winner"가 되야하는 법이다. 나는 언제나 친구나 동생들에게 보다 잔인하게 노력할 것을 이야기했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강요하고 있다. 교육체제라는 것이 엿같긴 하지만, 어쨌든 내 동생, 내 친구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보다 전반적인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야기는 아예 거꾸로 갈 것이다. 대입지상주의적인 교육, 세속적 성공 지향적인 시스템, 지나치게 성과 경쟁을 강요하는 문화, 빚을 지기를 요구하는 목돈사회. 전부 다 1년 365일 끊임없이 씹어대도 끝이 나지 않을 주제다. 사회적 성공이 요구하는 기준들은 점차 높아진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일단 시작 조건이 훌륭하거나, "잔인한" 노력이 필요하다. 둘 중 하나라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도태된다. 흔히 말해, 88만원 세대, 100만원 짜리 인생이 될 뿐이다. 경제신문들은 각자의 자아성취를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 경제 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게 엿같긴하지만, 어쨌든 모두가 그저 그렇게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질서를 나 자신 부터 완전히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지방대학을 다녀봐야 받는 건 멸시 뿐이고, 싸구려 경차를 타고 다녀 봐야 얻는 건 경멸 뿐이다. 나는 그런 시선들을 전부 견뎌낼 생각이 없다. 사람의 가치는 성품에서 나온다고 우길테지만, 나는 내 성품을 K5로 보일 생각이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 듯 싶다. 모두가 문제를 자각한다고 개인들의 행동이 변화하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의 경쟁체제가 바보같은 에너지 낭비 혹은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갈고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갈고리를 떼낼 생각은 별로 없다. 그 갈고리라는 게 정말 굉장히 힘든 존재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게다가 행여 "Winner"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그 곳


아무 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 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 곳, 이것은 질서


브레히트



갈등


  기초자치단체 공천제, 안철수 등으로 우리나라에 말이 많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여전히 야권에 쓸데없는 정쟁을 그만두고 민생에 집중하라고 나날이 재촉하고 있다. 정치권은 매일 시끄럽다. 경제신문들은 정당들이 경제 발전과 규제 완화에 집중하지 않고, 이권싸움만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맞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근데.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모든 인류가 하나의 존재로 합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인류는 LCL 용액이라는 가상의 액체가 되어 버린다. 그걸 LCL용액이라고 부를지, 인류라고 부를지야 너님들 맘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갈등과 분열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은 두 명만 모여도 싸운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아니면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 훌륭해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은 나쁜 것이며, 항상 단일한 목적을 향해 모두가 똑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갈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갈등이라고 부르는 건 그저 등돌리거나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것 밖에 없다. 그것 또한 재산, 연령, 사회적 지위 등 몇몇 지표들로 개인들 간의 갈등은 거의 대부분 매우 쉽게 해결된다. 자기 이익을 쫓는 것은 철저히 이기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국회에서 어떤 법안 통과를 두고 한 번만 대치해도, 대다수의국민들은 국회가 시끄러운 곳이라고 비난한다.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조차, 국회를 없애자는 구호에 박수를 보낸다. 심지어 대학교라는 순수한 곳에서 벌어지는 세미나들에서도 조금만 반론이 일어날만 하면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갈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9번 이기다가 1번 지면 진 것만 생각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워낙 갈등이 부족하다보니, 갈등이 한 번 생기면 오로지 온 국가가 시끄러운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갈등이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마치 체형과 얼굴이 다른 것 처럼, 생각도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다른 사람들이 자꾸 같아지려 한다는 것이다. 갈등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국회라는 건 싸우라고 뽑아놓은 곳이다. 그들이 안싸우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의 다른 이익들을 공론장에서 경연하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같은 이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어떤 특정한 권력자의 의지에 헌신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더 싸우라고 권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 우리가 이미 끝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고 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 
  물론 갈등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국회가 바보같아 보이는 건 시민들이 바보같기 때문이다. 갈등을 철저히 회피하려는 인간들이 갈등을 하는 척 하려다보니 바보같아지는 것이고, 마치 그들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들을 바보같다고 비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대 사회이다. 중세처럼 신이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고, 근대처럼 자본이나 군대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 사회는 각자의 가능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다. 당연히 각자의 개성이 부딪히는 갈등이 중요해지는 사회다. 그리고 그 끝없는 갈등 속에서 갈등에 대처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그것을 통해 단순 획일적인 한 가지의 메시지가 아니라, 추상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타협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사회다. 



인류가 될 지, LCL 용액이 될 지, 선택하는 건 너님들 맘이다. 



노동자


  우연히 학교에서 대학생-노동자 연합에 관한 대자보를 봤다. 군사정권과 발전국가 과정을 거치면서 대학생과 노동자의 연합은 굉장히 좋은 옵션이었다. 대학생들은 준 지식인이라는 타이틀과 순수함을 담보로 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대학생들이 가지지 못한 현실적 경험과 자기이익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조했고, 반정부투쟁에 있어서 그들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서 대학생-노동자 연합이라는 구호는 지극히 구태의 강령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었다. 개인적으로 노총이라던가, 노조 등에 연이 있어, 그들이 하는 연합대회라던가, 대규모 시위와 같은 것들을 조금은 근저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들이 여러 번 있었다. 어디에서든 그랬을테지만, 역시나 나는 그들의 대규모 모임에서 그리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그저 그들 또한 관습적으로 과거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은 함께 자리했던 지역노조간부분으로 부터 대회장에 울려퍼지는 투쟁가와 연설들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강력하게 설명들을 기회도 있었다. 빨간색 머리끈과 빨간색 구호가 난무하는 대회장에서 나는 그 분의 설명에 도무지 귀가 기울여지지가 않았다. 나와 같은 대학생들이 보다 이런 투쟁현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하셨지만, 그 분의 말씀과는 반대로 대학생들이 보다 이런 투쟁현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 처럼 보였다. 그 분은 요즘 대학생들이 풍요로운 환경에 살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썩어간다고 비판하셨다. 나는 요즘 대학생들이 풍요로운 환경에 살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썩어간다는 걸 뻔히 아시는 분들이 왜 그들을 설득 해내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대학생들은 과거의 대학생들과 다르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취업과 연애이고, 그들의 일상 생활은 충분한 정치적 자유라는 명목아래 풍요롭게 보장되고 있다. 지금의 노동자들도 과거의 노동자들과 다르다. 발전국가 시절의 경공업, 중공업 발전은 단순 현장 노동 중심의 산업노동자를 양산했고, 그들은 극렬히 탄압받았지만, 지금은 선진국 진입을 위한 서비스 산업 위주로 경제 구조가 재편되고 있고, 이미 충분히 진행되어 왔다. 과거와 같이 철저히 단순반복적 노동의 추세는 상당히 줄었고, 지금은 많은 노동자들이 조금씩 각자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당연히 연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노동자의 연대성이 훨씬 좋을 수 있는 조건이었던 19세기에도 실패했으니 애초에 노동자 연대라는게 이뤄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노동자-대학생 연합을 부르짖는 구호가 오히려 노동자-대학생의 분열을 촉진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다양함"이 난무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다양함"이 충분히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과거의 방법이 여전히 효과적일 만큼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조를 대하는 정부의 대처방식도 여전히 근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행태 또한 여전히 근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건 지금이 근대 사회는 아니라는 거다 "노동자"와 "대학생"이라는 계급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목소리와 연합들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썩어빠진 것으로 보이겠지.


  친구와 함께 있을 때였다. 무언가 영화를 한 편 봐야할 것만 같아서 영화를 보자고 했다. 무엇을 볼 지 고민하다가, 나는 "Ghost in the Shell" 을 보자고 제안했다. 친구는 흔쾌히 그렇게하자고 했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난 굉장한 무언의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환희도 아니고, 혼란도 아니고, 비참함도 아닌 전혀 알 수 없는 무지의 그런 느낌이었다. 잔향이 너무 강렬해서 두고두고 계속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뭔가 녀석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실수였다.
  녀석은 영화를 보기 전 부터 산만해보였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서, 내가 과거 느꼈던 것과 같이, 전혀 관심을 못 갖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이 해주고 싶어 입이 엄청나게 근질거리는 걸 잠자코 가만 있었다. 녀석은 이미 눈은 영화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조지 오웰이니, 올더스 헉슬리니, 매트릭스니 들먹이면서 마치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감을 잡고 있는 채 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해야되는지 잘 이해가 안되면서도, 잘 이해가 되었다. 나는 녀석이 조용히 집중해서 봤으면 했다. 하지만 녀석은 집중해서 보지 않았다. 내가 장면 장면 하나에 의미가 있으니 진중하게 보라고 얘기하자, 장면이 어쩌고 저쩌고 훌륭하다는 진정성이 전혀 없는 입바른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입을 닫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영화에 집중하는 데 엄청나게 힘들어보였다. 이해된다. 내가 처음 볼 때도 그랬고, 그 영화가 집중하기 쉬운 레파토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를 다 봤다. 역시나 녀석은 영화의 감상을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기분 나빠 했다. 갑자기 축구를 보는 척을 했고, 갑자기 과거 요즘 애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힐난했다는 글쓰기 수업 강사를 격하게 비난하는 이야기를 했다. 녀석의 기분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굉장히 짜증났다. 그 강사와 같은 이야기를 지금껏 해대었던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었던 건 차치하고, 녀석이 내는 화의 근원이 되는 "열등감"이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그 열등감을 비웃고 싶었다면, 난 그렇게 짜증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녀석이 열등하다고 비웃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슬펐다. 녀석은 나와 가장 비슷한 녀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거의 유사하게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그래서 녀석의 발광이 사실상 내가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모른다", "잘 이해가 안된다", "재미없다", "그냥 다른거 보자"는 말을 녀석과 나는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고상함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몰라도 아는 척하고, 알아도 아는 척한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보는 척 하고, 전혀 이해가 안되도 이해가 되는 척 한다. 
  나는 친구에게 직설적으로 수 많은 폭언과 모욕을 퍼부었다. 너의 인생의 중요한 몇 년을 너가 말 그대로 잉여처럼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보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무식하면 무식한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비난했다. 솔직히 내가 할 만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녀석이나 나나 뭐가 다르겠는가. 둘 다 멍청하고 무식하긴 매 한가지고, 둘 다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대우 받기 좋아하는 것도 매 한가지다. 영화를 선택한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최소한 각자 따로 보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내가 강제로 녀석에게 틀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냥 슬프다. 녀석이나 나나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부족함"이라는 지겨운 터널 속에서 함께 해매이다 보니, 녀석과 나는 함께 "여유"라는 것을 수많이 흘러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없이 약한 멘탈을 지탱하며 살아가려다 보니, 자꾸만 거짓된 것들을 꾸며 갖다 붙이게 되어버렸다. 그 날 나는 잠을 청하며, 껍데기만 남은 녀석과 나를 보았다. 더 비참한 건 새롭게 맞이했던 다음 아침도, 그 다음 날 아침도 여전히 허례와 거짓만 늘어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정말 미치도록 지겨운 나날들이다.  



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썩어빠진 것으로 보이겠지. - J. D. Salinger




공부 열심히해서 좋은 대학 가길 잘했다.


신죠 : 국장님이 제게 현지 본부장을 관두랍니다.

무로이 : 무슨 소린가?

신죠 : 솔직히 말하죠. 국장님 말씀이, 여기서 실수라도 하면 끝이랍니다. 전 더이상 점수 안 따도 승진할 수 있어요. 국장님이 동경대 선배니까요. 도호쿠 대학이죠? 무로이씨는.

무로이 : 그렇네.

신죠 : 그럼 이번에 공적을 세우는게 좋겠군요. 

무로이 :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 

신죠 : 저 말고 국장님 말씀입니다. 

무로이 : 내가 현지 본부장을 맡으라고?

신죠 : 당신의 앞길을 생각해도 그게 좋지 않겠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길 잘했습니다...






춤추는 대수사선 (1997)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웃는 남자


 즐거운 시대를 웃으며 산다면 행복하겠지만 잔인한 시대를 웃으며 살아야하니, 그 시대는 영락없이 비극이었다.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2014년 1월 4일 토요일

갑을관계.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보게 되면 어떤 비슷한 경향성을 느낄 수 있었다. 관계는 보통 남성들에 의해 시작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남성이 여성의 외모적인 측면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성을 일종의 "Object"로 인식한 남성은 그 여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한다. 우연을 가장한 수많은 만남을 시도하고, 평소에는 하등 관심없던 여성의 관심사에 대해 잘 알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언행에 굉장한 신중을 기하고, 때때로는 과한 선물 공세를 펼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에 보통 여성은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남성이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연인이 된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일정의 허니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남성은 여성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직업, 자신의 동성 혹은 이성 친구들, 자신의 관심사 등을 신경쓰기 시작한다. 반대로 여성은 자신의 삶을 모두 남성에게 맞추게 된다. 자신의 관심사, 자신의 안위는 버린 채 남성의 모든 것에만 신경을 쓰게 되고, 동시에 남성이 자신에게 똑같이 해주기를 기대한다. 남성은 답답함을, 여성은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갈등은 쌓여가고, 결국 굉장히 사소한 어떤 일이 트리거가 되어 그들은 결정적인 갈등을 갖게 되고,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난다. 

  면접은 영어로 interview이다. 모두가 다 알 듯, 수 많은 연예기사에서 나오는 인터뷰가 그 단어이고, 수 많은 신문기사에서 나오는 인터뷰가 바로 그 단어이다. 필자가 서구인이 아니다 보니 서구에서 면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알턱이 없다. 다만 이런 저런 직간접적 경험 등을 통해 대충 떠올릴 뿐이다. 거기서 받았던 느낌은 서구 사회가 얼마나 선진적이고 평등한 사회인지는 몰라도, interview가 꽤나 동등한 입장에서 쿨(cool)하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면접자와 피면접자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회사에 대해 혹은 피면접자에 대한 질문들을 서로 주고 받으며 서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회사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분명했다. "시험"이라기 보다는 "만남"에 가까워 보였다. 떨어져도 그리 아쉬울 것이 없는 느낌이다. 단지 이 자리(position)에 얼마나 적합한가를 따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특히 대기업 면접장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많이 펼쳐진다. 그건 interview가 아니라 test에 가까웠던 것 같다. 대다수의 면접장에서 면접관들은 마치 국가적 권위를 지닌 것 마냥 우월한 아우라를 가지고 멀리 탁자 뒷 편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다. 반대로 피면접자들은 법정의 피고인 마냥 허술한 의자에 몸을 지탱한 채 덜덜 떨고 있다. position에 관한 구체적인 description이 없는 만큼이나, 면접의 내용들은 전혀 알맹이가 없다. 면접에 참여하는 피면접자들의 숫자도 많을 뿐더러 그들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수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면접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면접에 찌들어야 할 뿐더러 그들의 두뇌와 질문 수준 또한 천편일률적일 뿐이다. 대답을 하기 애매한 질문에 애매한 대답이라도 해내면 피면접자들은 오줌을 지린 것 만큼이나 죄책감에 휩싸인다. 면접관(혹은 시험관)들은 애매한 대답이나 들었다 싶으면 피면접자가 자신이 헌신해온 회사의 명예를 모욕한 것 만큼이나 거칠게 표정을 찌뿌린다. 면접은 시험처럼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뉜다. 
  면접이 끝나면 더 멋진 일이 일어난다. 적게는 30개 부터 많게는 150개의 회사에 지원하는 피면접자들은(그렇게나 많은 회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의 폭넓은 아량이 놀라울 따름이다.) 복수의 회사에 합격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들은 그렇게 주눅들었던 회사들의 권위를 껌버리듯 거칠게 싸서 버린다. 그리고는 선택한 1개의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들은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열심히 이직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이유도 다양하다. 결국 그들은 공기업, 공무원, 전문직 등을 쫓아 이직 준비를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회사가 그들을 버리기 전에 그들이 박차고 나간다는 건 비용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선발하고, 가르치고, 적응시키는 비용은 회사가 고스란히 떠앉게 된다. 그리고 회사는 또다시 새로운 면접장에서 얼어있는 피면접자를 털어내기 위해 다시 한번 탁자 뒤편에 있는 권위의 아우라에 몸을 숨긴다. 그 면접자들이 언제 회사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하찮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건 덤이다. 

  한 때, 갑을 관계라는 용어가 유행을 탄 적이 있다. 계약서를 쓸 때 자주 사용한 갑과 을에서 따온 용어다. 위계서열과 권위주의가 역사적으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갑을 관계가 사회문화적 현상이 된다는 건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을은 언제나 갑에게 고개를 숙여야하고, 을은 갑의 말도 안 되는 여러 횡포들에 대해서도 머리를 수그리면서 버텨야한다. 갑은 마치 자신의 권력이 진시황의 그것인양 자만에 빠진다. 연애와 취직,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가장 핫한 관심사일 이 두 가지를 떠올리며, 나는 이 두 가지 또한 갑을 관계의 연장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어찌보면 우스운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행위자들이 갑을 관계라는 것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갑을 관계라는 상황의 가장 큰 맹점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갑이 언제까지 갑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을이 언제까지 을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뀌기 때문이다. 
  연애도 그렇다. 사귀기 전까지는 보통 여성이 갑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남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 속에서 행복해한다. 그리고 이 남자가 자신 밖에 모른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사귀고 나면 남성이 갑이 되기 시작한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친구로 부터 모든 것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자기 밖에 모른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진다. 취직시장도 그렇다. 피면접자들은 취직만 시켜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 면접자들은 그들의 관심에 취해 자신이 마치 위대한 사람이라도 된 마냥 거만 떨기 시작한다. 취직이 되고 나면 상황은 바뀐다. 피면접자들은 항상 도망갈 궁리, 다시 말해 항상 회사에 손해를 끼칠 궁리만 한다. 면접자들은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고 감시하는 궁리만 한다. 서로 참 대단한 에너지 낭비다. 
  


2014년 1월 2일 목요일

피아식별


  "민영화"라는 것에 말이 많다.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는 거의 강령 수준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나 역시 "민영화"라는 단어에서 별로 그리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가 무조건 반사적으로 나올 때가 있지 않은가 싶다. 요즘 같은 시국에 "민영화 찬성" 이라고 말한다면 "일베충"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긴 "민영화 찬성"이라는 구호의 저편에는 단순 반복적인 여당 지지라는 의미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도 싶다. 개인적인 편견이지만, 요즈음 같은 시국에 "민영화 찬성"이라고 말하는 건 아예 머리가 비어 있는 것이고, "민영화 반대"라고 말하는 건 머리가 비어 있는 데 안 비어있는 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칼은 요리사가 쓰면 작품이 나오지만, 조직폭력배가 쓰면 살인이 나온다. 정쟁이 심해지다 보니 "민영화"가 칼과 같은 사회를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잊혀지는 건 아닌가 싶다. 마냥 민영화를 한다고 사회가 다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민영화를 안 한다고 해서 사회가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결과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한, 이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도구"라는 것은 그렇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도구 자체는 매우 정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영화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 알맞는,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지, 니 편, 내 편 가르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철도 민영화를 한다고 요금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오르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 수준이 한 순간에 폭락하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민영화를 안 하고도, 요금이 갑자기 오를 수도 있고, 서비스 수준이 망가질 수도 있다. 그것을 운영하고, 이용하고, 논의하는 것이 전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민영화도 그렇다. 자꾸만 대립에 묻혀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중요한 문제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자꾸만 잊어가는 것 같다. 변화라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언제나 현실 상황은 애매하다. 단지 찬성이냐 반대냐만 가지고 피아식별을 하는 것이 생각하기에는 편할지는 모르지만,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궁극적으로 변화를 실현하는데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민영화 논란이 아쉽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더 심도있게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