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있을 때였다. 무언가 영화를 한 편 봐야할 것만 같아서 영화를 보자고 했다. 무엇을 볼 지 고민하다가, 나는 "Ghost in the Shell" 을 보자고 제안했다. 친구는 흔쾌히 그렇게하자고 했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난 굉장한 무언의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환희도 아니고, 혼란도 아니고, 비참함도 아닌 전혀 알 수 없는 무지의 그런 느낌이었다. 잔향이 너무 강렬해서 두고두고 계속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뭔가 녀석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실수였다.
녀석은 영화를 보기 전 부터 산만해보였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서, 내가 과거 느꼈던 것과 같이, 전혀 관심을 못 갖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이 해주고 싶어 입이 엄청나게 근질거리는 걸 잠자코 가만 있었다. 녀석은 이미 눈은 영화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조지 오웰이니, 올더스 헉슬리니, 매트릭스니 들먹이면서 마치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감을 잡고 있는 채 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해야되는지 잘 이해가 안되면서도, 잘 이해가 되었다. 나는 녀석이 조용히 집중해서 봤으면 했다. 하지만 녀석은 집중해서 보지 않았다. 내가 장면 장면 하나에 의미가 있으니 진중하게 보라고 얘기하자, 장면이 어쩌고 저쩌고 훌륭하다는 진정성이 전혀 없는 입바른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입을 닫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영화에 집중하는 데 엄청나게 힘들어보였다. 이해된다. 내가 처음 볼 때도 그랬고, 그 영화가 집중하기 쉬운 레파토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를 다 봤다. 역시나 녀석은 영화의 감상을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기분 나빠 했다. 갑자기 축구를 보는 척을 했고, 갑자기 과거 요즘 애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힐난했다는 글쓰기 수업 강사를 격하게 비난하는 이야기를 했다. 녀석의 기분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굉장히 짜증났다. 그 강사와 같은 이야기를 지금껏 해대었던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었던 건 차치하고, 녀석이 내는 화의 근원이 되는 "열등감"이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그 열등감을 비웃고 싶었다면, 난 그렇게 짜증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녀석이 열등하다고 비웃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슬펐다. 녀석은 나와 가장 비슷한 녀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거의 유사하게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그래서 녀석의 발광이 사실상 내가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모른다", "잘 이해가 안된다", "재미없다", "그냥 다른거 보자"는 말을 녀석과 나는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고상함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몰라도 아는 척하고, 알아도 아는 척한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보는 척 하고, 전혀 이해가 안되도 이해가 되는 척 한다.
나는 친구에게 직설적으로 수 많은 폭언과 모욕을 퍼부었다. 너의 인생의 중요한 몇 년을 너가 말 그대로 잉여처럼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보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무식하면 무식한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비난했다. 솔직히 내가 할 만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녀석이나 나나 뭐가 다르겠는가. 둘 다 멍청하고 무식하긴 매 한가지고, 둘 다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대우 받기 좋아하는 것도 매 한가지다. 영화를 선택한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최소한 각자 따로 보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내가 강제로 녀석에게 틀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냥 슬프다. 녀석이나 나나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부족함"이라는 지겨운 터널 속에서 함께 해매이다 보니, 녀석과 나는 함께 "여유"라는 것을 수많이 흘러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없이 약한 멘탈을 지탱하며 살아가려다 보니, 자꾸만 거짓된 것들을 꾸며 갖다 붙이게 되어버렸다. 그 날 나는 잠을 청하며, 껍데기만 남은 녀석과 나를 보았다. 더 비참한 건 새롭게 맞이했던 다음 아침도, 그 다음 날 아침도 여전히 허례와 거짓만 늘어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정말 미치도록 지겨운 나날들이다.
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썩어빠진 것으로 보이겠지. - J. D. Sal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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