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라는 것에 말이 많다.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는 거의 강령 수준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나 역시 "민영화"라는 단어에서 별로 그리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가 무조건 반사적으로 나올 때가 있지 않은가 싶다. 요즘 같은 시국에 "민영화 찬성" 이라고 말한다면 "일베충"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긴 "민영화 찬성"이라는 구호의 저편에는 단순 반복적인 여당 지지라는 의미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도 싶다. 개인적인 편견이지만, 요즈음 같은 시국에 "민영화 찬성"이라고 말하는 건 아예 머리가 비어 있는 것이고, "민영화 반대"라고 말하는 건 머리가 비어 있는 데 안 비어있는 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칼은 요리사가 쓰면 작품이 나오지만, 조직폭력배가 쓰면 살인이 나온다. 정쟁이 심해지다 보니 "민영화"가 칼과 같은 사회를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잊혀지는 건 아닌가 싶다. 마냥 민영화를 한다고 사회가 다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민영화를 안 한다고 해서 사회가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결과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한, 이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도구"라는 것은 그렇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도구 자체는 매우 정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영화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 알맞는,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지, 니 편, 내 편 가르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철도 민영화를 한다고 요금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오르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 수준이 한 순간에 폭락하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민영화를 안 하고도, 요금이 갑자기 오를 수도 있고, 서비스 수준이 망가질 수도 있다. 그것을 운영하고, 이용하고, 논의하는 것이 전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민영화도 그렇다. 자꾸만 대립에 묻혀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중요한 문제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자꾸만 잊어가는 것 같다. 변화라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언제나 현실 상황은 애매하다. 단지 찬성이냐 반대냐만 가지고 피아식별을 하는 것이 생각하기에는 편할지는 모르지만,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궁극적으로 변화를 실현하는데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민영화 논란이 아쉽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더 심도있게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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