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변호인


  최근 개봉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보러 갈 일이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림 사건을 비롯한 8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꽤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변호인"이라는 영화에도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호평을 하고 있었고, 관객 수 또한 빠른 시간에 쌓이고 있었기에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과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여러 다큐멘터리와 관련 영상들을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극이라는 형태에서 끓어오름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거 없었다.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런 건 없었다. 주변 사람에게 굳이 추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보면 좋겠지만, 뭐 굳이 안봐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최근에 보았던 영화 중에 어쩌면 조금은 비슷한 내용을 다룬 "남영동 1985"와 비교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남영동 쪽이 좀 더 완성도가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의 기대치가 달라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영동 1985"를 보고 난 후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깊은 무게감을 가진 메시지가 묵직하게 서서히 눌러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앞으로 더욱 노력하며 살아야하는 지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번 "변호인"을 보았을 때는 그다지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다. 


  먼저 픽션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혼란스러웠던 점을 말하고 싶다. 영화의 내용은 부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도 사실 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픽션과 실재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메시지들이 주는 의미들을 실제에 기반을 둔 채 판단해야하는 것인지, 픽션에 기반을 둔 채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단지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실재와 너무 가까웠고, 실재라고 보기에는 픽션이 많았다. 곽도원이라는 명배우가 연기한 차 경감은 너무나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느껴졌고, 국밥집이라는 것이 주인공 송변과 부림사건을 이어주는 극적인 장치라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가 극적인 몰입감을 느끼는 데 부담을 주는 것같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똑같이 가명이 쓰인 "남영동 1985"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가명의 혼란스러움을 "변호인"에서는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인 1987년의 장면은 장면자체는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맥락적인 면에서 내게는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뜬금없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 번째, 기승전결이 잘 느껴지지 않는 전개다. 나는 예고편을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국가는 국민이다."라는 대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이 클라이맥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대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다지 어떤 희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그저 식상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영화에서 "맨 오브 스틸"에서 봤던 것 같은 갑작스런 시간 전개들이 때때로 등장한다. "맨 오브 스틸"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변호인"에서도 여전히 난데없이 점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등기전문변호사 - 사시 준비생 시절 - 세무전문변호사 - 갑작스런 인권 변호사" 이 네 가지의 이야기가 그저 각각 별개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과거 회상 혹은 장면 회상 등은 나의 개인 적인 느낌으로는 극의 몰입도를 퍽퍽 끊어내는 것 같았다. 
  캐릭터의 배치 또한 많이 걸리는 문제였다. 사실 "극"이라는 점에서 나는 갈등의 대치관계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변호인"에서는 누가 "나쁜놈"인지가 명확치가 않았다. 주인공은 분명하지만, 그 주인공이 맞서고 있는 악역이 분명치가 않았다. 물론 정부와 당시의 시국이라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것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있고, 그 캐릭터와 주인공과의 갈등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극의 감정 전달에서 훨씬 좋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나쁜놈"이 있긴 있었다. 그것이 곽도원이라는 훌륭한 배우가 맡은 "차경감"이라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차경감은 주인공 송변과 맞서지 않는다. 극 중 가장 중요한 장소인 법정에서 차경감은 방청객 중 한 명 혹은 증인으로 나올 뿐이고 그가 진우를 고문할 때, 송변은 장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송변과 차경감이 직접적으로 엮이는 유일한 장면은, 내가 볼 때, 영화 "변호인" 중에서 가장 억지스러운 신이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대치하게 되는 검사는 어떤가. 악역 연기에서 상당히 인정받은 배우 조민기 씨가 분한 검사는 사실 영화에서 별 비중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법정 장면에서는 대립점이 판사에게 까지 나눠지면서 속된 말로 BGM으로 보일 만큼 비중이 없었다. 게다가 조민기 씨의 발음이 내게는 조금 이질적으로 들리는 느낌이 있었다. 너무나 쾌청하고 끝이 올라가는 그의 대사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였다. 더욱이 실제 재판에서도 그러했을지도 모르지만 송변에 비해, 검사의 변론은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로 허무하게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법정 장면들은 송변 혼자 떠드는 장면들 뿐이었다. 혼자 떠드는 것이 어떤 메시지를 쉽게 전달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감정적 흥분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차경감, 검사, 판사로 나눠진 악역 배치가 송변이 맞서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분명치 못하게 함으로써 몰입된 긴장상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이 영화의 "주"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는 법정 영화다. 법정이 중심이다. 법정에서의 변론, 갈등, 대립, 논리적 공격과 방어들이 중심이다. 그런데 그런 논리적 싸움의 치열함이 법정 장면에서 그다지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주인공 송변이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관해 변론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법정의 지적 긴장 상태가 별로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너무 주인공 송변의 영웅성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내용 자체가 그다지 긴장을 끌어올리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송변 혼자 잘난 척하는 내용이 "주"인 것 처럼 보였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에 덧붙여져 있는 여러 고문 장면, 수사 장면들이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다. 법정 영화인데 법정 장면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다보니, 고문, 수사 장면들이 영화의 "주"에 어른거렸고, 나는 그럼 이 영화가 도대체 고문을 말하고 싶은 건지, 법정싸움을 말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고문 장면들의 배치 또한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진술서를 맞추던 중에 진우와 그의 친구가 벚꽃 이야기를 하며 울 때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어이가 없었던 장면은 송변이 고문 장소에 잠입 액션을 벌일 때였다. 열심히 발품을 판다는 메시지는 이해하겠지만, 공안당국의 고문수사 장소가 저렇게 쉽게 뚫리는 것도 당황스러웠고, 또 거기서 차경감을 만나는 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차경감이 송변을 내리치고 이런 저런 쓸데없는 훈계를 늘어놓는 건, 영화의 진정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곽도원 씨의 연기는 훌륭했다. 다만, 그가 내뱉는 대사들이 우스꽝스러웠다. 6.25 때 부모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억지로 껴맞춘 듯 했고, 차경감이 왜 저렇게 빨갱이에 집착하는지도 사실 별로 감이 안왔다. 오히려 남영동에서 이경영씨의 과묵하게 표현되는 아우라를 가진 캐릭터가 오히려 더욱 와닿았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차경감이 감격스러운 듯 가슴에 손을 올리는 장면은 과하게 희화화 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 설정이 철저히 불필요한 설정이라고 확단한다. 감독은 그 설정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것으로 그렇게 픽션을 강조했던 그의 의도는 위선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는 류수영 씨가 분한 해동건설 회장 아드님의 대사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럴려면 국민소득이 몇배는 더 올라야 한다." 나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상관 관계지 인과관계가 아니다. "변호인"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드러나는 메시지 중의 하나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송변은 그의 스카웃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변호에 나선다. 그에 따르면 가난하다고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이성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상관관계를 극복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비용이 든다. 극 중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장된 부를 포기하고 보장된 안락을 포기해야한다. 심지어 그렇게 다 포기한다고 해서 바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포기하고도 끝없이 괴로움과 고난을 겪어야 하고, 추구하는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려야한다. 그래서 신념이 필요하고 진정성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점이 나는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자꾸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자보나 써갈겨대는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게 안녕하지 못한 너희들이 그런 용기를 가지고, 그런 비용을 전부 치뤄낼만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물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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