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와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그랜드슬램 결승 매치업이 성사됐다. 호주오픈에서는 2009년 이후 처음이고, 그랜드슬램 통틀어서는 2011년 프랑스오픈 결승 이후 6년 만이다.
2017 호주오픈Australian Open 준결승Semi-final
라파엘 나달Rafael Nadal(9) vs 그리고르 디미트로프Grigor Dimitrov(15)
6:3, 5:7, 7:6(5), 6:7(4), 6:4
애초에 나달이 쉽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이 경기는 예상외로 4시간 56분의 풀세트 접전이 펼쳐졌다. 두 가지 포인트를 꼽아보자면 "디미트로의 엄청난 선전"과 "지지 않는 나달"이다.
디미트로프의 엄청난 선전
먼저 디미트로프의 준수했던 백핸드이다. 많은 스핀으로 높게 바운드가 형성되는 나달의 포핸드를 한손 백핸드로 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한손 백핸드는 공을 아래서 위로 쓸러올리는 게 기본이다보니, 높은 볼 처리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달은 왼손 포핸드라 크로스가 오른손 잡이의 백핸드 위치에 대치된다. 이것이 디미트로프가 고전할 것이라는 예측의 기본 근거였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꽤나 준수한 백핸드를 보여주며 랠리를 지속시켰고, 백핸드 다운더 라인 공격을 꽤 많이 성공시켰다. 한손 백핸드의 각도 큰 공격을 나달은 포핸드 크로스로 받아내게 되니, 까다로운 탑스핀 공을 디미트로스가 백핸드 다운더라인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다운더라인을 자주 시도했고, 실제로도 꽤나 성공을 거뒀다. 약점으로 지적되는 백핸드가 랠리를 성공시키게 되니 당연히 경기는 길어졌고, 나달이 뛰는 거리도 길어졌다.
두 번째로는 훌륭한 방어력이다. 원래 디미트로프는 꽤나 공격적인 선수다. 실제 이번 경기에서도 디미트로프는 79개의 위너와 70개의 에러를 기록했다. 나달이 45개의 위너와 43개의 에러를 기록한 것에 비하면 거의 두배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는 수치다. 그런데 이번 경기에서 디미트로프는 공격보다 돋보이는 훌륭한 방어를 보여줬다. 평소같으면 에러나 범했을 나달의 탑스핀 스트록을 끝까지 쫓아가 코트로 집어넣었고, 랠리를 연장시켰다. 나달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뛰면서도(실제 경기에서 포인트당 뛴 거리기록이 나달의 23미터에 버금가는 21미터가 나오기도 했다.)랠리를 지속해냈고, 어떻게든 본인의 특기인 강한 포핸드로 때릴 찬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걸로 포인트를 따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디미트로프가 체력의 문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2년 호주오픈 결승에서 라파엘 나달과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가 보여준 5시간 53분 경기의 아성에 도전할 만큼 장시간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여기에 나달이 맞붙었던 3라운드, 4라운드, 8강의 알렉산더 즈베레프Alexander Zverev, 가엘 몽필스Gael Monfils, 밀로스 랴오니치Milos Raonic가 전부 겪었던 체력 문제를 디미트로프는 겪지 않은 듯 했다. 본인도 인터뷰에서 체력은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듯이, 디미트로프는 4세트, 5세트에서도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는 경기 마지막 순간에도 나달의 매치포인트를 두 번이나 방어해내기도 했다. 이것은 장시간 경기들로 피로가 누적되었을 나달을 상당히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디미트로프는 이번 경기 내내 상당히 훌륭한 멘탈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나는 이미 디미트로프의 약점 중의 하나가 멘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무려 황제 페더러도 니시코리Kei Nishikori와의 경기에서 화풀이를 한적이 있고, 바브린카Stanislas Wawrinka도 페더러와의 대결에서 다리로 라켓을 두동강 내는 진풍경을 보인 바 있다. 그런데 라켓 부수다 실격패까지 당해 본 바로 그 디미트로프가 상당히 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내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다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경기 종료후에도 나달에게 친밀하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퇴장했다. 오죽했으면 호주오픈 공식 사이트에서 경기에 관한 기사 타이틀로 "All winners, No losers"라고 뽑았겠는가. 나달 또한 인터뷰에서 5세트에 진입하자 이건 본인이 진다고 해도 그건 상대가 충분히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디미트로프는 굉장한 명승부를 훌륭히 보여줬고, 나달과 경기장의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화답했다. 나 또한 별로 아니꼽게 보았던 디미트로프에 대해 깊히 호감을 갖게된 경기였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지지않는 나달
참 경기내내 디미트로프의 강한 스트록 공격에 왠지 질 것 같았고, 실제로 몇 번은 패배를 눈앞에 두었던 나달이 결국은 승리해냈다. 마치 2009년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페르난도 베르다스코 Fernando Verdasco와의 경기의 재편을 보는 듯했다.(그때 경기에 대해서는 이미 나달 본인이 자서전에서 당시 마지막 게임에서 자신은 더이상 공을 쳐낼 자신이 없었다고 밝혔었다. 실제 경기는 베르다스코의 에러와 더블 폴트로 끝났다.)그 때 경기처럼 나달은 굉장히 힘들어보였지만 어쨌든 에러가 적었고 스트록을 코트 안에 끊임없이 넣었다.
나달은 본인이 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찬스상황에서 점수를 내주는 일이 은근 꽤나 잦다. 이번 경기에서도 브레이크를 성공시키고 곧바로 브레이크를 내준다던가, 매치포인트를 세 번째까지나 가져간다던가, 자신의 서브게임의 첫 두 포인트는 무조건 주고 시작한다던가, 러브 게임으로 이기고 있는 걸 역전당해 내준다던가 하는 경우들을 보여줬다. 13분이나 지속된 5세트 첫 게임의 브레이크 찬스가 그랬고 브레이크를 초반에 따냈던 2세트가 그랬다. 실제로도 15-16년의 경기들에서도 편안하게 리드하고 있거나, 승리를 눈앞에 둔 경기를 기어이 듀스까지 내주며 무너지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점은 이건 패배로 끝났다 싶은데, 말도 안되게 거기서 탈출한 경우도많다는 점이다. 바로 경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던 5세트 8번째 게임 즉, 나달의 서비스 게임이 그랬다.
나달은 게임 시작과 함께 날카로운 백핸드와 포핸드 공격을 가했지만 한끗차로 둘다 에러가 되고만다. 백핸드 공격으로 디미트로프의 백핸드 슬라이스 에러를 이끌어내며 15-30를 만들어내지만, 랠리에서 밀리며 스매쉬 포인트를 내줘 15-40 더블 브레이크 포인트 상황까지 밀린다. 5세트 게임스코어가 3:4상황이었으니 나달이 이 게임을 내주면 3:5가 되고, 다음 게임 서브가 디미트로프 차례니 사실상 경기를 내주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달이 져버렸네." 라고 말이다. 디미트로프가 한 포인트만 따면 사실상 경기는 디미트로프에게 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나달은 믿기 어려운 경기력으로 랠리를 주도하며 네 포인트를 연속으로 따내고 서비스 게임을 가져갔다. 첫 포인트는 날카로운 크로스 백핸드로 디미트로프를 이동시킨 뒤 침착하게 다운더 라인 백핸드로 땄다. 이 다음 두 개의 위너가 특기할 만 하다. 나달은 강한 스트록 쳐낸 뒤, 디미트로프가 뒤로 밀리자 귀신같이 네트 어프로치 후 포핸드 발리로 두 개의 위너를 따냈다. 말그대로 승부수 였다. 강한 스트록이 제대로 안들어가도 실패하고, 상대의 리턴이 행여나 강해도 실패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먹혀들었고 이어 디미트로프가 포핸드가 길어지며 게임이 마무리되었다. 사실상 이 게임에서 경기의 결과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분위기를 탄 나달은 곧바로 디미트로프의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해냈다. 30-40 브레이크 포인트 상황에서, 나달과 비슷하게 강한 스트록 이후 네트 어프로치를 하던 디미트로프에게 나달은 탑스핀이 잔뜩 걸려 네트 앞쪽에서 짧고 강하게 떨어지는 러닝 다운더라인 패싱샷을 쳤고, 디미트로프는 늦은 발리로 쳐내면서 공은 크게 공중으로 떴다. 완벽한 찬스볼이 된 것이다. 나달은 놓치지 않고 네트앞에 힘없이 떨어진 볼을 투핸드 패싱샷으로 브레이크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경기는 완벽히 나달에게 기울었다. 이미 경기 최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포인트들이 전부 나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나달의 위너 혹은 나달의 에러)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달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나달은 듀스가 연속된 세번째 매치포인트만에 탑스핀을 받아친 디미트로프의 백핸드가 베이스라인을 살짝 벗어나며 승리를 얻어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비록 세트를 내주기는 했지만, 2세트에서도 있었다. 게임스코어 3:5의 디미트로프 서비스 게임 상황을 기어이 브레이크 해내고, 4:5 본인 서브 게임에서는 세트 포인트까지 밀린 걸 기어이 따내서 5:5 동점을 만들었다. 비록 이후 내리 두 게임 내주며 세트도 내줬지만 말이다.
이번 경기로 참 나달은 쉽게 지지 않는 구나 싶었다. 참 쉽게 이기지는 못하지만, 참 쉽게 지지 않는 선수구나 싶었다. 4강 쯤 올라와서 인지 기세가 올라서 풋워크도 꽤 안정됐고, 스트록도 상당히 힘있게 뻗었다. 과거와 같은 엄청나게 빠른 발놀림이나 바나나처럼 휘어들어가는 패싱샷은 잘 안나오지만 그래도 엄청난 체력과 수준높은 방어력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참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경기를 놓치다가 또 다 몰린 상황을 이겨내며 승리하니 역시 나달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싶다.
자, 이제 Federer & Nadal..
이제 역대급 라이벌인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와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결승전만 남았다. 페더러가 우승하면, 5년만의 그랜드슬램 우승이자, 개인통산 18번째 우승이고, 35년 11개월로 켄 로스웰Ken Rosewell에 이은 역대 세 번째 최고령 그랜드슬램 우승이다. 나달이 우승하면, 오픈 시대 이후 최초로 모든 그랜드 슬램을 두 번씩 우승하는 기록인 더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달성이자, 피트 샘프라스Pete Sampras를 제치고 역대 그랜드 슬램 우승 단독 2위에 오르게 되는 기록이 된다. 누가 우승하든 굉장히 뜻깊다.
조코비치가 득세하던 테니스계에 이제는 30대들이 되어버린 페더러와 나달이 파이널에 올라왔다. 나달은 언론 인터뷰에서 30대들이 벌이는 결승전이 앞으로는 안나올 것 같으니 충분히 즐기라고 말했다. 왠지 경기력은 페더러가 더 좋은 것 같지만, 긴 탑스핀 스트로크로 체력전을 펼친다면 나달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기도하다. 내가 테니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래로 참으로 고대하던 순간이라 그런지 내가 다 설레서 잠이 안올지경이다. 페더러와 나달의 그랜드 슬램 결승을 지금이라도 라이브로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증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