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3일 월요일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는 올라운더All-rounder



1.


  이번 호주오픈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와 토마스 베르디흐Tomas Berdych(버디치라고 부르는게 맞나?)의 3회전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감동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페더러가 올라운더, 올라운더 하길래 나도 당연히 그냥 기계적으로 페더러는 올라운더, 올라운더라고 말해 왔는데, 그 경기를 보면서 페더러가 왜 올라운더인지,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다.



SEGA Virtua Tennis 4에서의 로저 페더러. 역시 플레이스타일이 All-Round다.


  내가 생각한 바는 이렇다. 테니스에는 생각보다 매우 다양한 볼들이 있다. 세게 후려쳐 날아가는 플랫 타구도 있고, 나달처럼 톱스핀을 강하게 줘서 궤적의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타구, 낮게 스치듯 날아와 잘 튀지 않는 슬라이스라던지, 고각을 줘서 네트 바로 앞에 떨구는 드롭샷이라든지, 여기에 각을 크게 주는 발리, 앞에 짧게 떨구는 발리, 멀리 밀어주는 발리, 그리고 스매시 등 여러 타구들이 있다. 물론 그 공들도 각각 짧게 주거나, 크로스로 주거나, 다운더 라인으로 주거나, 길게 주거나, 크로스 각을 크게 주거나, 하프 발리 하게끔 주거나, 아니면 니시코리 케이Nishikori Kei처럼 공이 튀어 다 떠오르기 전에 한템포 빨리 때려 보내거나 등등 하여간 엄청나게 많은 배리에이션이 있다. 
  보통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각각의 특성, 상황 그리고 다양한 외부적 조건들에 따라, 여러가지 양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의도한 바도 있고,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의도와 우연이 함께 겹쳐 나오는 경우라고 말하는게 가장 크게 포괄할 수 있는 경우 일 것이다. 




출처: www.ausopen.com
  


  이번 경기를 보면서 정말, 과연 페더러는 테니스를 지배하는 구나 싶었다. 저 선수는 우연성에서 벗어나 저 수많은 샷의 배리에이션과 나타나는 상황들을 전부 다 이해하고 있구나싶었다. 새삼스럽지만, 느닷없이 그렇게 느꼈다. 조코비치Novak Djokovic는 참 재수는 없지만 진짜 날카롭게 잘 친다는 느낌이고, 나달Rafael Nadal은 참 아슬아슬하게 하는 데, 이상하게 이긴다는 느낌이라면, 페더러는 그냥 테니스라는 스포츠 자체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철저히 테니스의 모든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술들을 모두 정확하게 의도에 기반하여 사용하며, 그 의도가 철저히 기술에 적용되는 것 같았다. 낮은 볼 처리가 취약한 베르디흐에게 철저히 바운드가 낮은 볼, 발리, 드랍샷, 강하게 밀어치는 포핸드, 서브라인에 짧게 밀어주는 슬라이스 등등 하나하나를 전부 여유로운 모습과 우아한 폼으로 경기를 진행해가는 것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멋지다, 멋지다하며 과거부터 보았지만, 이번에야 말로 페더러가 왜 황제인지, 올타임 넘버원인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참 나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지만, 그리고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도 지겹도록 봐왔지만, 정말 저 다양한 샷들과 다양한 상황들을 저렇게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건 페더러가 유일한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페더러의 플레이를 보며 몸에 전율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왜 그리도 페더러가 나달을 상대로 고전했는지 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

  같이 테니스를 치던 동생이 한 명 있다. 녀석은 나보다 구력도 훠~얼씬 길고, 당연히 기량도 훠~얼씬 뛰어나다. 그냥 내가 나이를 좀 더 먹었고, 내가 구력이 짧으니 부담이 없다는 걸 빼면 딱히 내가 나은 점은 없다. 녀석의 빌어먹을 톱스핀 서브를 받을때면, 녀석이 일부러 나를 골려주려고 저러나 싶다. 
  녀석은 내가 열심히 뛰어다닌다는 점을 좋게 봐서, 실력차가 무지하게 나는 데도 불구하고 친히(?) 나와 공을 쳐줬다. 단식 경기도 자주했다. 당연히 내가 모두 졌다. 한 번 억지로 이긴적이 있지만, 그건 타이브레이크 중간에 내가 1점 앞선 상황에서 녀석이 일이 있어 먼저 가야한다고 하자, 그것을 내가 승리로 우겼을 뿐이다. 그렇다! 엄청나게 기량차가 나는 데, 나는 녀석과 무려 타이브레이크까지 간 적이 있다. 왜 일까? 
  그 친구는 종종 내게 말했다. 나와 경기를 하는게 힘들다고 말이다. 일단 나는 구력과 기량, 기술 모든 면에서 떨어지는 것을 오로지 열심히 뛰는 걸로 커버하려고 한다. 나달에 대한 깊은 존경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실력이 떨어지니 타구가 매우 불안정하다. 짧았다가, 느닷없이 붕 떴다가, 베이스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기도 한다. 여기에 쓰레기같은 슬라이스도 난무하고, 심지어 나는 상대가 조금만 베이스라인 뒤에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드랍샷을 쓴다. 오로지 나는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공을 라인 안에 집어넣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실수로, 강한 서브나, 탑스핀 포핸드 혹은 빠른 백핸드가 나온다. 즉, 내가 공을 어떻게 칠지, 어떤 공을 칠지 도무지 예측이 안되서 게임이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뭔가 랠리같은 랠리가 나와야 녀석도 제 실력을 발휘할텐데, 랠리는 커녕, 예측 불허의 똥볼들(근데 결국 아웃은 아닌)만 나오니, 동요된다는 것이다. 
  녀석과 나의 기량은 비교도 안되지만, 녀석은 나의 허접한 실력에서 나오는 불확실성에서 적잖이 당황하는 것이다. 마치 철권같은 대전게임에서 상당한 고수가 완전 초보를 만났을 때, 의외로 패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테니스에서 "불확실성"이 "확실성"에 작용하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한다. 



3.

  왜 페더러는 나달을 상대로 고전했을까. 뭐 여러 전문가들이 내놓은 다양한 분석들은 둘째치고, 단순히 나의 직관적인 느낌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불확실성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로저 페더러가 확실한 테니스의 정점이라면, 라파엘 나달은 정말 불확실한 테니스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페더러는 모든 가능한 기술들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예측된 상황을 지배하는 것 같다. 반면에 나달은 임기응변적인 측면에서 즉흥적인 방어 플레이를 함으로써 예측불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달이라고 계획과 예측없이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페더러라고 모든 걸 예측하고 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상대적인 느낌차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페더러는 랭킹 1위도 최장기 연속으로 유지했고, 총 랭킹 1위 기간도 역대 최장기다. 반면 나달의 랭킹은 커리어내내 2위를 엄청 오래한 것 빼면, 등폭이 참으로 격렬하다. 1위를 딱히 오래하지도 않았다. 포핸드 같은 경우도 페더러의 포핸드는 직선타로 파고드는 아주 정확한 이스턴 그립의 포핸드로 유명하다. 페더러가 굉장히 선전하는 장소 또한 외부적 영향(바람이라던가, 습도라던가, 흙이라던가)이 가능한 배제된 인도어-하드 코트이다. 반면, 나달의 장기는 스핀을 강하게 줌으로써 궤적의 예측 불가능성을 극도로 높이는 탑스핀 포핸드이다. 이것이 외부적 영향들과 겹쳐지는 아웃도어-클레이 코트가 바로 나달의 주무대이다. 페더러와 나달의 전적은 인도어 하드코트에서 페더러가 5승 1패로 앞서고, 아웃도어 클레이 코트에서는 나달이 13승 2패로 앞선다. 
  차이는 또 있다. 페더러의 경기를 보면, (특히나 나이가 든 최근으로 올수록) 철저히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가능한한 베이스라인에 바짝 붙어서 랠리를 하고, 발리시도를 자주한다. 나이 탓인지 베이스라인 뒤로 물러설수록 랠리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니시코리 케이Nishikori Kei와의 이번 호주오픈 16강에서도 베이스라인 뒤로 물러서서 치는 긴 랠리에서는 여지없이 밀렸다. 이렇듯 페더러는 정확하고, 직선적인 모습에서 기반을 둔 철저히 효율적인 테니스를 펼친다. 짧게 치는 것이나 길게 치는 것이나 슬라이스나 전부 철저히 의도된 것 처럼 보인다. 공이 짧아도 바운드가 높지 않고, 네트 살짝 걸쳐서 낮고 빠르게 들어오니 받아치기가 쉽지가 않다. 
  반면 나달은 어떠한가, 엄청나게 부잡하다. 공을 겨우 맞받아 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허리를 통해 정확하게 상체를 회전시키며 강하게 밀어치는 페더러의 포핸드와 달리, 나달의 오픈 스탠스에서 상체를 뒤로 빼고, 라켓을 위로 긁는 듯한 포핸드 자세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힘이 부쳐보일 정도이다. 공도 짧았다, 길었다, 가운데로 몰렸다가 코너로 갔다가 제 맘대로다. 절대 저건 의도적인게 아니다. 그냥 바쁘게 그 때, 그 때 방어해내다보니 저렇게 된 것 뿐이다. 슬라이스도 후지다. 간신히 겨우 공 넘기려고 치는 수준이다. 좌우로 뛰느라 바쁜데, 저건 못받을 것 같은데 하는 걸 또 엄청 달려가서 느닷없이 포인트로 만들고, 저건 완전히 잡는 공인데 싶은 걸 느닷없이 네트에 꼬라박는다. 참으로 정신이 없다. 친구 중 하나는 나달-즈베레프 경기와 페더러-니시코리 경기를 보더니, 후자에 비하니 나달의 경기가 정말 수준떨어져 보인다고 평가했다.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수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페더러가 나달을 상대로 고전하는 이유인 것 같다. 테니스라는 스포츠 자체를 지배하고 내다보고 있는 페더러가 나달이 가진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에 당황하며 무너지는 것이다. 페더러와 나달이 처음 맞붙었던 2004년 마이애미 오픈에서 페더러가 충격적으로 패배한 이후, 페더러는 나달을 가리켜, 원래 10대들은 무작정 달려드기만하니 예측하기 어렵다고 평한바가 있는데, 이것이 이후 투어 내내 페더러와 나달의 라이벌리에서 이어진 것이다. 마치 가장 완벽한 이성이라도 이 불확실한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페더러-나달의 라이벌리가 왜 그토록 인기를 끌었으며, 여전히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지, 왜 조코비치가 페더러의 라이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어색한지, 왜 조코비치와 머레이의 라이벌리가 그리도 재미가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테니스라는 스포츠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상황을 철저히 완벽하게 장악하는 테니스의 황제 페더러와, 그 절대자 페더러에게 굴욕적일 만큼의 패배를 안겼으며, 페더러의 확실한 플레이를 철저한 불확실성으로 맞서면서 역대급 승부들을 만들어내는 도전자 나달의 대결은 단순히 잘하는 선수들 간의 대결을 넘어 하나의 고차원적인 관념 간의 승부로까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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