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무로 근처였던 것 같다. 친구와 걷다가 어느 호텔 앞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는 백인 관광객들을 보았다. 나는 좁은 식견으로 그들을 멋대로 "미국인"으로 규정짓고 함께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양키들은 진짜 좋겠다."
"왜?"
"쟤들은 대통령이 오바마잖아."
함께 걷던 친구는 내가 내놓은 대답이 딱히 무슨 뜻인지 더 묻지 않은채 시원하게 웃었다. 그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2.
아는 후배가 물었던 적이 있다. 문재인을 찍었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정치도 잘 모르고, 세상도 잘 모르지만, 박근혜는 진짜 아니지 않냐고 내게 말했다. 당시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내게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안심했다. "다행이다. 녀석은 나와 한 편이구나" 오랜시간 말을 아끼며 조심히 대했던 나는 그 친구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나는 쉴새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만약 방한하여, 대통령이 된 건설사 사장 나부랭이나 독재자의 딸 따위를 만난다면, 한국이란 나라를 얼마나 같잖게 생각할 것인지. 자본가들이 왜 독재자들을 다루기 쉽다고 여기는지.
반면 자본가들이 "인권변호사"라는 경력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특전사 출신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하며 청와대 수석자리 마저 내던진 인물이며, 가장 울분에 차있을 때 정적에게 예의를 갖추는 인간이 대통령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생기고 간지나는 대통령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반면 자본가들이 "인권변호사"라는 경력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특전사 출신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하며 청와대 수석자리 마저 내던진 인물이며, 가장 울분에 차있을 때 정적에게 예의를 갖추는 인간이 대통령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생기고 간지나는 대통령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내게 문재인 찍었냐고 물었던 그 후배와 봤던 개표방송은 결국 단 한 번도 역전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박근혜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4년 후, 바로 그 "독재자의 딸"은 탄핵당했다.
3.
겨울이 막 시작될 때 였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살던 집 근처에 왔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그녀에게 뭔가 화가 나있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오르막이 싫다고 집 근처 오르막 아래 가만히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선 후보 포스터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던 벽 가로등 아래 그녀는 그렇게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화 따위는 진즉에 풀렸다. 그녀와 가로등 아래 한참을 서있었다. 막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박원순 서울시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던 그녀는 대선 포스터들을 보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그녀는 박근혜가 별로라고 했다. 포스터에 비친 빨간 코트부터 표정까지 전부 별로라고 했다. 덧붙여 자신이라면 포스터를 이따위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박근혜에 가지는 일종의 본능적 혐오감에 비하면 평범한 비호감 정도였다.
그녀는 박근혜가 별로라고 했다. 포스터에 비친 빨간 코트부터 표정까지 전부 별로라고 했다. 덧붙여 자신이라면 포스터를 이따위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박근혜에 가지는 일종의 본능적 혐오감에 비하면 평범한 비호감 정도였다.
그녀는 문재인도 별로라고 했다. 왠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대선에서 누굴 찍어야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선거캠프원이라도 된 마냥 문재인을 찍어야 하는 이유를 그녀에게 거창하게 늘어놨다. 추운 겨울밤 어느 골목길 가로등 아래, 대선포스터 하나 놓고, 나와 그녀는 수 시간을 떠들었다. 흔한 담배 한 개피도, 따뜻한 커피 한잔도 없이 마냥 그렇게 서서 떠들었다.
4.
문재인 대통령. 너무 오랜시간 문 전 대표, 문 후보 따위로 불러서 그런지 도무지 어색하다. 그는 당을 중심에 두고 선거를 치뤘고, 누군가와 단일화를 하지도 않았다. 5자 구도속에 그는 40%이상의 상당한 득표율을 얻었고, 역대 가장 큰 표수차를 내고 당선되었다. 보궐이기 때문에 그는 인수위도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고, 내 삶 또한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그런데 4년 전,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양키들을 부러워했다. 단지 그들의 대통령이 간지가 나서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반대를 느끼고 있다. 자신들의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인 미국인들은 이제 나를 그리고 우리를 부러워할게 틀림없다. 그리고 트럼프를 뽑은 저 선진국의 바보들을 나는 한없이 비웃을 거다.
특전사, 인권변호사, 민주화 운동, 노무현의 친구, 네팔 봉사활동, 홍은동 산골 빌라, 예의, 원칙, 경청, 명왕, 잘생긴 외모, 멋진 백발 등등. 이야기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냥 이틀 밖에 안됐지만, 왠지 즐겁다. 저렇게 간지나는 사람이 내 대통령이라니. 그노무 아베에게 쿨하게 고노담화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2년 대선 때 부터 외쳐왔고, 이번 취임사에도 포함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이 호칭이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동시에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 나랑 하등 연관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에 불과하지만, 괜히 숨만 쉬어도 뿌듯하다. 참 많은 추억들이 흘러지나간다. 그걸 다시 되짚어보는 지금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기분이 든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2년 대선 때 부터 외쳐왔고, 이번 취임사에도 포함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이 호칭이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동시에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 나랑 하등 연관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에 불과하지만, 괜히 숨만 쉬어도 뿌듯하다. 참 많은 추억들이 흘러지나간다. 그걸 다시 되짚어보는 지금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기분이 든다.
문재인은 대통령이 됐으니, 이제 나달이 프랑스오픈만 우승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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