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앉아있던 세월호가 23일을 기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름 만감이 교차했다. 침몰한 지 3년 여 만이고, 인양 공법 변경을 결정한 지 대략 4개월 여 만이고, 인양 시도에 들어 간지 2주 정도 만이다. 지난해 말 인양을 연기하기로 결정한 이후 소조기에 맞춰 인양에 들어 간 것으로 보이나, 마침 박근혜의 스캔들과 탄핵에 맞춰 인용 공법 변경과 인용 시도가 이뤄지면서 마치 박근혜 씨가 사라지자 세월호가 인양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사실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청와대가 세월호에 기겁을 하니 정부부처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박근혜가 스캔들로 사실 상 힘을 잃고, 탄핵국면에서 세월호 이슈가 다시 부각되니, 해수부가 적극성을 보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가격이 싸서 결정됐다는 상하이 샐비지가 결국 자신들이 최초에 주장했던 인양 공법을 포기하고, 다른 업체들이 제시한 공법으로 현재 세월호를 인양에 거의 성공하게 되었다. 주변에 펜스 치느라 해수부가 대략 100억 쯤 더 썼다고 하니, 상하이 샐비지를 선택해서 아낀 돈도 사실 상 퉁친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리도 어려운 일처럼 보였던 세월호를 수면 위에서 다시 보는 일이 고작 2주 만에, 사실상 작업시작 이틀도 안되어 이루어지게 되니 조금은 어이가 없고 허무하기 까지도 했다. 박근혜정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비정했는지를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광화문에는 노란 세월호 천막이 꽤 오랜 시간 쳐져있었다. 나 또한 때때로 광화문을 지나며 그 천막을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세월호와 관련된 사람은 없다.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당시 내가 앓았던 천식의 고통보다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광화문에 설치된 노란 세월호 천막도 지겹다고 종종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어디선가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면, 저 이야기도 작작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낸 적도 많다. 대중의 연민은 진정될 수 밖에 없고, 그럴수록 저들만 더욱 비참해져갈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따위 소리를 늘어놓은 건, 존나 이성적인 척 하는 개쿨병에 쳐걸린 것 반, 저들의 싸움이란 것도 어차피 잊혀져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증오가 반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학 철학자인 칼 포퍼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타인의 일에 대해 신경끄라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다. 만약 개인들이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타인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면 전체주의에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칼 포퍼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실제 그렇게 자신과 관련이 없는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진정성 있게 느끼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나와 가까운 사람이 희생 당사자가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딱히 노력하지도 않았다.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 격앙되어봤자, 그것은 위선일 뿐이고, 결국은 모두에게 해가 될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세월호 참사 당시 수없이 나왔던 슬픔에 가득찬 반응과 추모의 소설들에 오히려 반감을 가졌다. 내가 관심있게 본 부분은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처, 사고의 원인 그리고 그것의 개선 가능성, 책임이 어디로 귀착될 것이고, 어디로 귀착되어야하는지 정도에 있었다.
하지만. 시베리아 기단이 당도한 것만 같이 시원한 이 개쿨함은 접어두고, 어쨌든 슬픈 건 슬픈거다. 아니 단지 슬프다고 표현하다기 보다 울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 사고는 날 수 있다. 여객선이 침몰한 사건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사고도 많이 있었다. 이 사건이 울분을 주는 이유는 어떻게 "국가", "정부"라는 것이 이렇게 무능력하고 비정하게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언젠가 딴지일보 기사에서 본 것 같다. 우리가 정부라는 걸 만든 이유 중에 하나는 불편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이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볼 때, 병원비가 밀려 강제로 퇴원되어야하는 중환자를 볼 때, 어린 가장이 되어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중학생을 볼 때, 빚쟁이에 쫓겨 자식의 책 값을 줄 수 없는 가장을 볼 때 우리는 울분을 느낀다. 저런 병신같은 꼴을 보는 게 불편해서 그렇다. 연민과 부조리의 감정을 애써 외면한 채, 결국에는 눈과 귀를 닫고 내 자신의 하찮은 삶에만 신경쓰게 될 때 느끼는 그 양심의 가책이 불편해서 그렇다. 그냥 저런 거지같은 꼴이 보기 싫어서, 그것을 보며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이 너무 불편하고 싫어서 우리는 국가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국민 개개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라고. 국민 개개인이 타인의 불행에 신경끄고 각자의 소시민적 삶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정부가 대신 열심히 나서서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안타까운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세금까지 내가며 정부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소시민의 삶을 간신히 사는 것도 버거운데, 내가 왜 저 어린 학생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불편하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왜 하찮은 소시민에 불과한 내가 그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시달려야하는가. 저런 참사가 터졌을 때, 나 같은 대다수의 소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부라는 게 모두를 대신해 열심히 나서서 희생이 나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막아야하는 것 아닌가. 근데 왜 정부라는 것은 고위 관료의 현장 기념 촬영에 헬기 동원하느라 바쁘고, 대통령의 한량생활을 숨겨주기에 바쁘고, 구조를 돕는 민간인들을 막아서고 재판에 세우느라 바쁘기만 한가. 비굴함에 젖은 밥을 간신히 벌어쳐먹고 살기도 바쁜데, 왜 나와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의 불행에 울분까지 느껴야하는가. 국가란 도대체 뭐하는 존재인가.
세월호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금 파면된 박근혜 씨와 그 내각에 대해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검찰이 박근혜 씨 구속을 두고 고심 중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밥이 넘어가다 체할 지경이 되어 결국 뉴스 보는 것을 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