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러면 자네도 나와 의견이 같은지 어떤지를 보아주게."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목수가 구두를 만들고 제화공이 목수일을 할 경우, 나라에 무엇인가 큰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ㅡ "큰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ㅡ "그러나 본래 노동자이거나 돈벌이계급에 속한 자가 전사계급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든가, 전사가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수호자계급으로 들어간다든가 하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음모는 나라의 멸망을 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ㅡ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ㅡ "그렇다면 국가에는 세 개의 계급이 있는데, 이들 계급 간의 상호변화나 음모는 국가에 대해 큰 죄악이며 또 지극히 사악한 짓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 ㅡ "확실히 그렇습니다." ㅡ "그런데 자신의 국가에 대한 가장 사악한 행위는 부정의라고 자넨 주장할 것이 아닌가?" ㅡ "그렇습니다." ㅡ "그러면 그게 곧 부정의일세. 그리고 우리는 거꾸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네. 국가의 모든 계급이, 즉 돈벌이계급과 보조자 계급과 수호자 계급이 자신의 일에 열중할 경우, 이것이 곧 정의일 것이다."
이제 이 논증을 살펴보면 (a) 엄격한 계급제도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국가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회학적 가정, (b)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은 부정의라는 첫 번째 논증의 끓임없는 반복과, (c) 그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이상이 사회적 변화를 저지하는 것이고, 그는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는 그 어떤 것도 '해롭다'고 설명하는 고로, 사회학적 가정 (a)를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변화는 엄격한 계급제도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부정의의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c)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관심사는 (b)로, 플라톤의 논증을 일별해 보면, 그의 사상의 전 추세가 이것은 국가에 해로운가, 많이 해로운가, 아니면 거의 해롭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좌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국가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하고 부정의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단 한 가지 궁극적인 기준만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지 국가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것은 선량하고 덕 있고 정의로우나 무엇이든 그것을 위협하는 것은 나쁘고 사악하고 불의이다.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위는 도덕적이고,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플라톤의 도덕법전은 엄격한 공리주의로, 집단주의자나 정치적 공리주의의 법전이다. 도덕성의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도덕은 다름 아닌 정치적 건강법이다.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I, 이한구 역 p177~178
요약하자면, 플라톤은 계급이동은 국가 안정에 해를 끼치고, 국가 안정에 해를 끼치는 것이 부정의이므로, 계급이동을 막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칼 포퍼는 이러한 정의론이 "국가의 이익"에만 오로지 결정적인 전체주의적 입장이라고 비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은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라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시도한 위와 같은 논증은 순전히 사변적인 것에 불과한 논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본래",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이 두 가지 표현에 의해서 강조되고, 노동자, 상인, 수호자, 전사 등등의 계급으로 표현된 대상들. 이러한 사전적인 정의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것이 과연 동어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 라던가 "글라우콘"이라던가, "칼 포퍼"라던가 하는 실제적인 조건이 아니라, 위와 같이 "수호자", "상인", "전사" 따위로 표현된 것들은 당연히 표현 그 자체에서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호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수호자"를 떠올리지, "처칠"을 떠올리지 않는다. 플라톤에게서 내내 강조되는 "이데아"의 개념처럼 만큼이나 "수호자"라는 표현에는 이미 "수호"라는 기능을 위한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있다. 따라서 "수호자"가 "상인"의 역할을 한다거나, "상인"이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논증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된다. 여기에 "본래",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등의 표현이 덧붙여지면, 더 말할것도 없다. 따라서 플라톤의 논증은 그 자체만을 놓고는 반박할 수 없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계급이 각 계급의 일을 한다." 라는 지극히 사변적이고 동어반복적인 명제는 그것이 명확하게 "정의"를 가리키는 명제인지, 아닌 지-이것이 포퍼가 책에서 다뤘던 내용이다-는 차치하고서라도, 내용 자체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논증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일단은 무조건 "맞는" 얘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종교와 같다. 나처럼 플라톤에 대해 알 수 없는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진리처럼 추앙할 것이고, 그게 아닌 사람들은 "그냥 당연한 말 아닌가." 라며 지나쳐버릴 것이다.
책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며, 위에서 발췌한 부분의 핵심 내용은 물론 플라톤의 논증에서 드러나는 국가 중심적 정의론, 조금 과장해서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한 칼 포퍼의 비판이다. 잔뜩 인용해놓고 보니, 편린에 집중한 것 같아 멋적다. 어쨌든, 즐겁게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