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자네는 뭐하는 친구인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쉬고 있었다. 바람도 쐴 겸, 글 쓴다는 친구가 있는 시골에 잠깐 내려갔다. 친구가 지내고 있는 곳은 녀석의 후배네 부모님 댁이었다. 나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미리 전해 들었던 친구 녀석의 말 그대로였다. 도착하자마자 앉어 있을 겨를도 없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고추밭에 나섰다. 그렇게 며칠을 거기서 묵었다. 낮에는 일을 했고, 밤에는 친구 녀석이 쓰는 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 곳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 곳의 아무도 내가 무얼하는 사람인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삼촌, 동네 할머님들, 옆집 아저씨, 건넛집 아저씨들.. 모두 내가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무슨 일을 하는 지, 얼마나 돈을 잘버는 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그런 것들 따위를 전혀 묻지 않으셨다. 그저 거기서 나는 "OO의 친구"이자 그저 "젊은 일꾼" 일 뿐이었다. 어머님과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님과 술잔을 비울 때도, 삼촌과 담배연기를 나눌 때도, 그들에게 나는 정말로 그저 눈앞에 서있는 "나" 그대로 일뿐이었다. 
  그들 앞에서 내가 가진 허례와 허물들은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고, 그들 앞에서 나는 오로지 순수한 나 자신만 남았다. 얼마나 멋진 경험인가? 오랜 고난과 번뇌 속에서 그토록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자유로움이 너무나도 쉽게 내게 찾아왔다. 그렇게 그런 젊은 "일꾼"의 일원으로서 나는 다른 "일꾼"들과 노동의 감각을 공유했고, 새참의 미각을 나눴다. 


  우리 아버님께 친구를 소개하면 아버님은 항상 물으신다. "그 친구는 뭐하냐 애냐?", " 그 애는 어디 학교 나왔다냐?". 친구의 세속적 지위나 상황에 따라 가려 사귀라는 그런 천박한 이야기를 하고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아버님께서 묻는 그런 질문들은 그저 이 사회에 상존하는 가장 간단한 스테레오 타입을 통해 그 친구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아버님에게 배운 건지 나 또한 새로운 친구에 대해 들을 때면, 습관적으로 "그 친구는 뭐하는 애냐?" 라고 묻곤 한다. 내가 물은 것이 분명 그 친구가 취미로 나무를 깎는 일을 한다던지,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애라던지, 따위는 아닐 것이다. 단지 녀석의 세속적 지위가 궁금했을 뿐인 거다. 물론 녀석도 나에 관해 똑같이 물을 것이다. 계속 시달려야 한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민감해진다. 항상 어떤 그럴듯한 타이틀을 계속 만들어둬야 한다. 그리고 수십번, 수백번 씩 되내이면서 살아야한다. 그들이 물을 때 마다, 결국 내가 내 자신에게 물을 때마다. 
  그래서 슬프다. 나의 꿈과 비전을 멋들어지게 늘어놓을 만큼 호기롭지도, 성숙하지도 못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 속에 스스로는 계속 작아지고 지쳐간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모든 상대를 살피고 같이 끝어내리고자 한다. 나만 내려 갈 수 없다. 나도 상대들에게 묻는다. 이 모든 건 끝없이 재생산 된다. 슬픔은 계속해서 돌고 돈다. 나와 당신, 모두가 이 슬픈 대기를 만든다.
  도시에서의 느낌은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언제나 남이 무엇을 하는지 신경쓰며 살고, 언제나 남이 나를 어떻게 볼 지 두려워하며 산다. 그런 무거움과 지겨움은 차근차근 짓눌러온다. 벗어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간단치 않다. 자만감도 독이 되고 열등감도 독이 된다. 칭찬도 공격이고, 비난도 공격이다. 서로가 서로를 상처입히면서 살아간다. 


  시골에서의 경험은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볼 수도 있다는 걸 느낀 일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그저 잠시 왔다간 "OO의 친구"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눈 앞에서 직접 마주치고, 부딫히고, 느낀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다지 엮일 일이 없는 외부인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일시적인 느낌이라하더라도, 그 느낌은 정말 진정한 자유의 냄새가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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