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시코리 케이Kei Nishikori와 정현의 3라운드 경기는 예상대로 니시코리의 승리로 끝났다. "예상대로"라고 쿨하게 말하기에 정현은 선전했고, 니시코리는 또다시 멘붕에 빠질뻔한 경기였긴하다. 4세트를 개운하게 내주고 5세트를 준비한 니시코리는 페이스를 올리면서 브레이크를 선취하며 앞서나갔다. 그렇게 무난하게 5:3에서 정현의 서브게임을 러브게임으로 내주고 자신의 서브게임으로 세트를 마무리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느닷없이 니시코리는 브레이크를 내줬다. 하지만 마치 클래스의 차이를 보이듯, 위기상황에서 니시코리는 더욱 선전했고, 정현은 더블 폴트로 패배를 확정지었다. 7:5, 6:4, 6:7(4), 0:6, 6:4로 니시코리는 4라운드에 진출했다.
니시코리는 역시 탑클래스의 선수 답게, 좋지않은 컨디션과 경기력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정현이 탑클래스에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실력은 아니라는 시사점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포인트를 따낼 수 있는 있는 역량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그건 일종의 "승리의 경험" 같은거다. 대진빨이던, 컨디션빨이던, 순전히 우연이던 간에 투어 대회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경험이 한 번만 쌓인다면 정현은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될 것 같다.
2.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은 로베르토 바티스타 어굿Roberto Bautista Agut을 상대로 롤랑가로스 4회전을 치뤘다. 6:1, 6:2, 6:2, 나달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는 딱히 분석하거나 평하거나 할게 없었다. 그냥 나달이 무서울 정도로 잘했다. 어굿이 성공시킨 1번의 브레이크는 경기초반 더블 폴트 2개를 포함한 나달의 자멸적 플레이에 의한 것이었고, 다른 4번의 서비스 게임 승리 또한 힘겹게 지켜낸 것이었다.
어굿의 총 에러는 49개에 달했다. 이는 나달의 37개 보다 12개나 많은 것이었다. 확실한 피니시가 없지만, 적은 에러를 기반으로 한 방어형 선수인 어굿이 그렇게 많은 에러를 범한 것이다. 위너는 12개에 불과했다. 3개가 카운터형 패싱샷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베이스라인 랠리 승리가 고작 9개에 그쳤다. King of clay는 그 두배에 달하는 18개(총 27개)를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은 나달의 공격이 얼마나 매서웠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어굿이 얼마나 고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경기를 비롯해 경기내내 나달의 눈에 띠는 특징은 나달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백핸드는 과거와 같이 방어형으로만 쓰기보다는 확실히 공격 무기로 쓰는 모습이 많이 나타났다. 비록 백핸드 위너가 4개에 불과했고, 경기 중반 쯤 영점이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확실히 백핸드를 자신있게 밀어치는 장면이 여러번 등장했다.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공 치는 타이밍을 빨리 가져가려고 했다. 평소보다 위너와 에러가 함께 늘어났다는 게 이를 방증할 것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베이스라인 멀찍이 뒤에서 경기를 펼치기로 유명한 바로 그 나달이 발리 대시를 망설이다 포인트를 내줬다는 것이다. 나달은 경기 도중 내 기억으로 3번 정도 발리 대시를 두고 망설이다 포인트를 내줬다. 나달의 네트플레이 횟수가 확실히 늘어난 것이다.
어굿은 일정함, 꾸준함으로 승부하는 선수다. 딱히 특별한 강점은 없지만 동시에 딱히 특별한 약점도 없다. 클레이 코트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드코트에서 전적이 더 좋지만, 클레이라고 딱히 손해보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다. 이는 현재 공격형 나달을 상대하는 데 굉장한 독이 되었다. 공격형 선수가 돼있는 나달이 자기 마음대로 공격을 연습할 훌륭한 상대였다. 나달이 발리대시하다가 혹은 나달의 피니쉬를 어굿이 카운터 해낸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어굿이 득을 본 건 없었다. 서브도 애써 거의 전부 나달의 백핸드 쪽으로만 보냈지만, 딱히 그게 랠리 주도권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굿은 완벽하게 king of clay의 상성에 말려들었다.
출처:rolandgarros.com
8강 드로에 이름을 올린 첫 선수가 된 King of Clay의 다음 상대는 빅서버 밀로스 랴오니치Milos Raonic를 풀세트 끝에 컷아웃 시키고 올라온 스페인의 카레노 부스타Pablo Carreno Busta이다. 세계랭킹 21위 (스페인 랭킹 4위, 나달-어굿-라모스 비뇰라스-부스타)인 이 선수는 알베르토 라모스-비뇰라스Albert Ramos-Vinolas와 함께 스페인 출신의 클레이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한 선수이다. 그냥 흔한 베이스라이너이다. 부스타는 스페인 출신의 베이스라이너인 니콜라스 알마그로Nicolas Almagro, 토미 로브레도Tommy Robredo, 다비드 페러David Ferrer등을 상대로 승리하며 250대회인 에스토릴 오픈Estoril Open에서 우승했다. 당연히 클레이 코트 대회다. 최근 열린 로마마스터즈에서는 이번에 나달에게 패배한 어굿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역시 이번 대회 1회전에서 나달에게 패배한 브누아 페르Benoit Paire에게 가볍게 패배하고 탈락했다. 역시 부스타 또한 공격형 선수로 거듭나고 있는 King of Clay에게 압도적으로 털릴까 하지 않은 게 나의 예상이다. 어굿에 비하면 부스타가 좀더 공격적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뭐 그리 위협적인 선수는 아닐 듯하다.
4강 상대로 유력한 선수는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와 도미닉 티엠Dominic Thiem이다. King of Clay의 후계자로 불리우는 티엠은 쾌조의 컨디션으로 무실세트 경기를 연타하고 있다. 조코비치는 여전히 별로 컨디션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몬테카를로에서 나달을 괴롭혔던 단신의 디에코 슈와르츠먼Diego Schwartzman은 롤랑가로스 3회전에서 만난 조코비치를 상처입혔다. 3세트 경기였으면 조코비치의 패배로 끝났을 경기는 슈와르츠먼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조코비치의 풀세트 승리로 끝났다. 경기 내내 짜증내다 심판한테 경고먹자, 심판에게 달라들던 조코비치의 멘탈을 고려하면 조코비치가 탈락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저런 어설픈 폼이 유지된다면 조코비치는 4강에서 나달을 만나기도 전에 티엠에게 털리지 않을까 싶다. 조코비치의 4라운드 상대는 위에서 말한 라모스 비뇰라스인데, 비뇰라스가 비록 몬테카를로에서 세계랭킹 1위 앤디 머레이Andy Murray를 탈락시킨 이변을 연출한 선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코비치는 이기기는 어려워보인다. 만약 비뇰라스가 조코비치의 좌우 랠리에 안정적으로 대처만 해내면서, 조코비치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노린다면 승산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하여간 이번 롤랑가로스에서 나달의 경기는 무슨 매경기 하나하나가 전부 나달 스페셜 하이라이트 동영상 보는 것 같다. 조코비치의 15-16년의 강력함이 방어적 굳건함에서 오는 것이었다면, 이번 나달의 폼은 무슨 매경기마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방어도 방어지만 공격의 화력이 강력해져서 그런듯 하다. 지금 폼만 봐서는 나달이 너무 잘해서, 누가 나달을 위협하는 상대가 될수는 있을지, 누가 나달을 저지할지, 아예 전혀 감이 안와서 불안할 지경이다. 나달의 롤랑가로스 라 데시마에 그나마 티엠 혹은 조코비치가 상대가 될 4강이 가장 큰 고비일 것이다. 요새 테니스 증말 재미있다. 이대로 나달이 반드시 10번째 우승을 해냈으면 좋겠다.
출처: rolandgarr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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