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 거장은 항상 정확한 시간이 되면 산책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산책 시간 어긴적이 딱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늦은 것이고, 다른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다룬 신문을 읽다가 늦었다고 한다.
2011년 모하메드 부하지지라는 한 청년의 죽음을 시작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혁명의 물결에 물들었다.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까지 전공한 그는 취직이 안되자 트럭 과일 노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허가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던 과일과 트럭을 튀니지 당국에 모조리 압수당했고, 이에 그가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돌아온 건, 묵살과 뇌물 요구 밖에 없었다. 그는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 자살을 했다.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의 강압수사를 못 이기고, 저택 뒷산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국민들은 분노했고, 거리에 나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진행됐다. 장례를 맡았던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국민장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슬픔을 쏟아냈다.
2.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분노와 허무감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면 성공한다." 라는 상징이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켜면 자살하게 된다."는 상징이 된 꼴이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도, 그리고 나중에 봉하마을에 가서 그를 추모할 때도 나는 눈물을 수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국민장에 가지 않았다. 딱히 이유같은 건 없다. 그냥 가지 않았다.
한 때 에릭 홉스봄의 시대 3부작을 시작으로 프랑스 혁명사에 심취하여 관련한 자료를 끝없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의 진행 과정을 반추할 때면, 알수없는 흥분이 느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해야할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도서관 한구석에 쳐박혀 끊임없이 읽어댔다. 스스로 대견해했다. 또한 왜 나는 이런 역사적 시대에 없었을까 아쉬워했다.
2011년 혁명에 대해 알게 된 건 그 쯤이다. 혁명이 끝나고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던 즈음이다. 프랑스 혁명이란 과거에 흥분했던 나는 내가 바로 살고 있던 시대에 있는 혁명을 새까맣게 잊어먹고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칸트는 신문보다가 평생을 지킨 산책시간도 놓쳤다는데, 나는 귀막고 골방에 쳐박혀 과거나 빨며 자만하고 있던 꼴이었다. 이 후 나는 부채의식에 짓눌렸고 내 미래 설계는 크게 변했다.
그리고 오늘.
시위 인원이 추산 100만을 넘었다는 뉴스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건국 이래 최대 인원이다. 인원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상당히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는 국민의 뜻을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여전히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봐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여튼 그들은 그렇다고 한다. 검찰은 박 대통령에 대한 소환조사 일정과 방법을 검토중이라고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말이다. 제 1 야당인 더민주당의 지도부는 기어이 하야라는 말을 못하고, "손떼라"는 진심 바보 같은 구호를 들고 나섰다. TV조선은, 내자동에서 대치중이던 시민 한 명이 경찰버스 위에 올라가 몸싸움을 벌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폭력시위가 나라를 망칠 수 있다며 뭐 같은 소리를 늘어놨다. 이런 식으로 폭력시위가 계속된다면, 트럼프의 지지층과 같이 지지율에 나타나지 않는 박근혜의 지지층에 의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으름장은 보너스다.
하지만 나는 시위에 나가지 않았다. 일이 끝나지 않아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비열하고 저급한 변명이다. 한 시라도 뛰쳐나가고 싶은데,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런 데 나가면, 막 신나고 재밌고 그래서 나간대"라고 지껄여대는 멍청이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정말 정말 깊고 깊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어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 시국에 느끼고 있다는 바로 그 책임감과 사명감이었다.
역사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그리도 다짐 했건만.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를 씹으며 쿨한 척 했던 것을 그리도 후회했건만. 그리도 역사적인 오늘,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 이런 시국에 뻘소리나 늘어놓으며, 뻘짓거리나 하고 있는 내 주변의 머저리들은 도무지 끝날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래도 그 머저리들보다 역겹고 위선적인 건 바로 나 자신일 거다.
왜 이런 부끄러움과 치욕까지 느껴야 하는가. 잘못은 저들이 저질렀건만, 사사롭고 일상적이고 소시민 적인 삶에 잘 숨어 있는 내가 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저들이 없었다면 이따위 치욕과 분노없이 어련히 무난한 일상을 넘겼을 것인데 말이다.
정말 제발 좀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다. 다시 소시민적 일상에 아무런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