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기준 주최 추산 45만 명(경찰 추산 13만 5천)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시위에 모였다. 지난 주 100만에 비하면 절반 정도이다. 숫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 상황은 그렇다. 벌써 4차 집회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초기부터 강하게 푸시했던 국정 어젠다 중의 하나이다. 정부부처가 총동원되어 나름의 과제 목표들을 정하고 차근차근 시행 중이다. 경제분야, 안전분야 뭐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나름의 의의를 정하고, 모든 정부 부처가 뛰어들어 참여하고 있다.
국정어젠다를 설명하는 메인 홈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봐도 비정상의 정상화가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다. 뭐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데, 그냥 당연한 소리들을 던져놓는 관례적인 것에 불과해 보였다. 이게 다 내가 무지하고 몽매한 탓이 아니겠나 스스로를 탓했다.
대략 50만이 서울 광화문에 모여서 시위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전부 합치면, 대략 전국 100만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나 싶다. 시위가 시작한 이래, 모든 시위의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친구는 오늘은 박사모를 보고 가겠다고 서울역을 향하며 한 마디를 남겼다. "하, 진짜 피곤하다, 피곤해. 이거 뭐 언제까지 나가야 돼?" 시위에 지쳤다는 게 아니라, 뭐 이정도 했으면 그만 내려오셔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지난 12일 시위 이 후, 청와대는 엄숙히 듣겠다는 식의 의례 표현 외에는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사과문도 없고, 담화도 없다. 누구말마따나 자기 딴에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역정을 내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사는 "여성의 사생활"을 운운하며, 검찰조사를 사실상 거부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의 단독 회동 번복 이후, 느닷없이 청와대는 엘시티 관련 수사를 엄정히 하라는 지시를 시작으로 한일정보보호협정 가서명, 황교안 총리의 APEC 참석, 청와대 수석과 문체부 차관 인사 등을 강행했다. 심지어는 다음 주에 있을 국무회의 주재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갤럽에 따르면 3주 연속 지지율이 5%이고, 새누리당은 분당 직전이고, 국회는 국정조사를 시작했고, 4주 째 하야시위가 이어지고 있는데,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공식화 한 것이다.
법리적 문제라던지, 제도적 문제라던지, 헌법 질서에 따른 문제라던지, 수많은 문제들을 다 떠나서, 이 정도로 파격적인 국정농단 사건을 일으키고, 온 국민이 일어나 매일 하야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이 마당에,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있는 건지 하루하루 대단히 놀라울 지경이다. 자신을 수사해야 하는 검찰에 전혀 협조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검찰에 다른 사건 수사를 지시했을 때는 그 성정적 강직함과 굳건함에 경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50만의 시위를 보면서 들었던 내 걱정은 바로 박 대통령의 국정기조였던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정부의 표현 의도와 달리, 말 그대로 "비정상의 정상화",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대로 지속되어 오히려 "정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국민들이라고, 매일 매주 100만 씩 데모하겠는가. 그들도 지쳐간다. 이제 충격적인 소식도 너무 많이 들어서 왼만한 게 나와서는 충격의 수준도 체감해 간다. 저번 주 100만이었는데, 이번 주 50만이니, 국민의 반발 심리도 이제 다시 수습되고 있다고 청와대가 혹시라도 자위라도할까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다.
보통 같으면 진즉에 박살났어야 하는 이 나라가 "합리적이고 발전된 국가체계"와 "국민들의 경이로운 평화시위", 그리고 "청와대의 뻔뻔함"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 놀라울 만큼 평화롭게 유지되고 있다. 청와대와 이정현 대표가 법치 질서와 수습을 명분으로 버티고 있는 이 상황이 더없이 견디기 힘들다. 도대체 언제까지 청와대가 저렇게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탄핵정국으로 가야 뭐가 될 것인지, 국회에서 거국 내각 총리로 또 한바탕 싸우다가 이 사건의 파동이 약해지는 건 아니게 될지, 시간이 지나고 이제 이런 충격들이 전부 익숙한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박근혜 정부는 그들의 국정 어젠더 하나는 정말 훌륭하게 해낸 것 같다. 이런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이제는 태연하게 "정상적인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게 아닌가. 마치 많은 시민들이 이명박 정권에 비난했음에도 박근혜씨가 당선 된 것처럼, 국정원 여론 조작 사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지부지 되었던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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