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만류귀종萬流歸宗



  학부 시절, 이것 저것 쓰잘데 없는 책들을 별나게 읽다보니 쓰잘데 없는 것들을 어깨넘어 많이 보게 되었다. 그 중에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강의록도 있었다. 그 책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분명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인데, 책의 초반부가 사실 상 물리학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 "힘", 다시말해 "역학力學"이라는 물리학적 관점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물리학과 자본주의라니, 얼핏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나름 그럴듯한 설명들이었고, 나는 꽤나 매료되었었다. 
 
  나는 본래 전공 외에 다른 분야들에도 자꾸 기웃거렸지만, 그 중에서도 물리학, 특히 천체 물리학에 흥미가 많이 갔다. 전공으로 들어가기에 나의 수학적 능력은 매우 미약하기 그지 없기에 상식이나 교양 수준에서 가능한한 많은 텍스트를 보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와중에 흥미롭게 보았던 이야기는 바로 물리학의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하나의 틀 내에서 아우르는 통일장 이론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부족한 이해수준에서)대충 세계를 세 가지로 구분해보면, 먼저 원자에서 시작해 전자, 중성자, 광자 등의 개념들로 알려진 미시세계가 있다. 다음으로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느낄 수 있는 일상 세계가 있고, 이것이 행성, 항상 등 우주 수준으로 거하게 확장된 거시세계가 있다. 일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절대공간을 가정한 뉴턴의 고전물리학 체계로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광속(c)이 난무하는 거시세계로 가면 뉴턴 체계의 정확도는 매우 떨어지고, 바로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에 의해 제기된 상대성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반대로 미시세계에서는 약한 상호작용weak interaction, 강한 상호작용strong interaction이 등장하면서, 상대성이론을 포함한 고전물리학보다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한다. 

  뭐 최근에 나온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라던가,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라든가, TOE(Theory of Everything)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전부 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모순 없이 한방에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나온 이야기다. 초끈이론이 뭐 입자를 끈의 진동으로 설명한다는 그런거라는데, 입증도, 예측도, 검증도 제대로 된바가 없어서 한계라고 하고, 통일장이론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네 가지의 힘 중 세 가지인 전자기력,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까지는 어떻게 묶었으나, 아인슈타인의 소망이었던 중력까지 묶는 것에 실패했다고 한다. TOE는 뭐 모든 힘을 묶는 일관된 체계가 나오면 그것이 "모든 것에 관한 이론"이 될 것이라는 데, 정말로 누군가가 그 체계를 발견해 낸다면, 그 사람은 노벨상은 물론, 인류가 없어질 때까지 이름이 회자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게 발견될까도 싶다. 하긴 또 발견되나, 아니, 구성될건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나는 저 내용들에 관해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에 한창 빠진 적이 있다. 

  일종의 실천윤리 같은 측면에서 어떤 사람에게 제언해야하는, 혹은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건,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인 한에서 노력의 최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건에 대한 "순응"이다. 그 개인의 목표가 거시적 제도의 변화든 단지 개인의 세속적 성공이든 그건 목표의 차이일 뿐이고, 일종의 당위적 실천윤리로 그 개인은 스스로 노력을 최대화 해야한다. 그게 일종의 미시세계라고 보았다. 

  반대로 거시세계는 거대 규모의 조직들, 집단들이 있는 세계이다. 거시적 관점에서 어떤 행위자에게 필요한 실천윤리는 "주어진 조건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쉽게말해 조건에 대한 "반항"이다. 거시세계의 실천윤리의 대상이 되는 논제는 기본적으로 개인과 멀고, 개인의 자기이익self-interest와도 멀고, 논제 자체도 추상적이다. 따라서 행위자인 개인은 조건에 순응할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비록 내 자신과 나의 가까운 사람에게는 돈을 가능한 많이 벌어 성공한 사업가가 되라고 말할지언정,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한다"라는 것이 일종의 실천윤리에 관한 내 생각이었다. 미시와 거시세계에서 사실 상 반대의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혹시 동일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통일된 실천윤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였다. 

  미시세계에서 행위자의 개인적 목표가 "조건의 전환 혹은 구조의 전환"이라면, 두 세계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행위자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실천윤리는 조건에 대한 순응이라는 미시적 실천윤리이지만, 그가 목표를 달성해나가는 것이 바로 조건에 대한 반항이라는 거시적 실천윤리의 요구까지 달성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러셀의 역설과 같은 것 같다. '조건"이라는 개념에 들린 두 차원적 의미를 중첩함으로써 해결한 것에 불과해 보였다. 마치 조건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목표로서 또 다른 차원에 집어넣으면서, 조건이라는 개념에 달린 변동성의 스위치를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출력할 수 있는 단 차원의 틀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불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데, 물리학의 통일장이론이나, 내가 생각하는 뻘 지론이나, 어떻게 일관된 체계로 통합이 될 수 있을까. 싶다. 과거에 하곤 했던 뻘 지론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적어보다보니, 내가 구분한 실천 윤리의 근거를 보다 정교하게 사고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실천윤리라고 적으면서 필요한 당위성의 근거를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하긴 뭐가 쉽게 되면, 만류귀종이라는 말이나 나왔겠는가. 시국이 시국이라 그런지 나날이 뻘생각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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