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변호인


  최근 개봉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보러 갈 일이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림 사건을 비롯한 8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꽤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변호인"이라는 영화에도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호평을 하고 있었고, 관객 수 또한 빠른 시간에 쌓이고 있었기에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과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여러 다큐멘터리와 관련 영상들을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극이라는 형태에서 끓어오름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거 없었다.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런 건 없었다. 주변 사람에게 굳이 추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보면 좋겠지만, 뭐 굳이 안봐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최근에 보았던 영화 중에 어쩌면 조금은 비슷한 내용을 다룬 "남영동 1985"와 비교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남영동 쪽이 좀 더 완성도가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의 기대치가 달라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영동 1985"를 보고 난 후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깊은 무게감을 가진 메시지가 묵직하게 서서히 눌러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앞으로 더욱 노력하며 살아야하는 지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번 "변호인"을 보았을 때는 그다지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다. 


  먼저 픽션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혼란스러웠던 점을 말하고 싶다. 영화의 내용은 부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도 사실 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픽션과 실재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메시지들이 주는 의미들을 실제에 기반을 둔 채 판단해야하는 것인지, 픽션에 기반을 둔 채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단지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실재와 너무 가까웠고, 실재라고 보기에는 픽션이 많았다. 곽도원이라는 명배우가 연기한 차 경감은 너무나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느껴졌고, 국밥집이라는 것이 주인공 송변과 부림사건을 이어주는 극적인 장치라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가 극적인 몰입감을 느끼는 데 부담을 주는 것같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똑같이 가명이 쓰인 "남영동 1985"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가명의 혼란스러움을 "변호인"에서는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인 1987년의 장면은 장면자체는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맥락적인 면에서 내게는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뜬금없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두 번째, 기승전결이 잘 느껴지지 않는 전개다. 나는 예고편을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국가는 국민이다."라는 대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이 클라이맥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대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다지 어떤 희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그저 식상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영화에서 "맨 오브 스틸"에서 봤던 것 같은 갑작스런 시간 전개들이 때때로 등장한다. "맨 오브 스틸"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변호인"에서도 여전히 난데없이 점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등기전문변호사 - 사시 준비생 시절 - 세무전문변호사 - 갑작스런 인권 변호사" 이 네 가지의 이야기가 그저 각각 별개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과거 회상 혹은 장면 회상 등은 나의 개인 적인 느낌으로는 극의 몰입도를 퍽퍽 끊어내는 것 같았다. 
  캐릭터의 배치 또한 많이 걸리는 문제였다. 사실 "극"이라는 점에서 나는 갈등의 대치관계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변호인"에서는 누가 "나쁜놈"인지가 명확치가 않았다. 주인공은 분명하지만, 그 주인공이 맞서고 있는 악역이 분명치가 않았다. 물론 정부와 당시의 시국이라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것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있고, 그 캐릭터와 주인공과의 갈등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극의 감정 전달에서 훨씬 좋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나쁜놈"이 있긴 있었다. 그것이 곽도원이라는 훌륭한 배우가 맡은 "차경감"이라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차경감은 주인공 송변과 맞서지 않는다. 극 중 가장 중요한 장소인 법정에서 차경감은 방청객 중 한 명 혹은 증인으로 나올 뿐이고 그가 진우를 고문할 때, 송변은 장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송변과 차경감이 직접적으로 엮이는 유일한 장면은, 내가 볼 때, 영화 "변호인" 중에서 가장 억지스러운 신이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대치하게 되는 검사는 어떤가. 악역 연기에서 상당히 인정받은 배우 조민기 씨가 분한 검사는 사실 영화에서 별 비중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법정 장면에서는 대립점이 판사에게 까지 나눠지면서 속된 말로 BGM으로 보일 만큼 비중이 없었다. 게다가 조민기 씨의 발음이 내게는 조금 이질적으로 들리는 느낌이 있었다. 너무나 쾌청하고 끝이 올라가는 그의 대사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였다. 더욱이 실제 재판에서도 그러했을지도 모르지만 송변에 비해, 검사의 변론은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로 허무하게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법정 장면들은 송변 혼자 떠드는 장면들 뿐이었다. 혼자 떠드는 것이 어떤 메시지를 쉽게 전달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감정적 흥분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차경감, 검사, 판사로 나눠진 악역 배치가 송변이 맞서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분명치 못하게 함으로써 몰입된 긴장상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이 영화의 "주"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는 법정 영화다. 법정이 중심이다. 법정에서의 변론, 갈등, 대립, 논리적 공격과 방어들이 중심이다. 그런데 그런 논리적 싸움의 치열함이 법정 장면에서 그다지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주인공 송변이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관해 변론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법정의 지적 긴장 상태가 별로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너무 주인공 송변의 영웅성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내용 자체가 그다지 긴장을 끌어올리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송변 혼자 잘난 척하는 내용이 "주"인 것 처럼 보였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에 덧붙여져 있는 여러 고문 장면, 수사 장면들이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다. 법정 영화인데 법정 장면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다보니, 고문, 수사 장면들이 영화의 "주"에 어른거렸고, 나는 그럼 이 영화가 도대체 고문을 말하고 싶은 건지, 법정싸움을 말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고문 장면들의 배치 또한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진술서를 맞추던 중에 진우와 그의 친구가 벚꽃 이야기를 하며 울 때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어이가 없었던 장면은 송변이 고문 장소에 잠입 액션을 벌일 때였다. 열심히 발품을 판다는 메시지는 이해하겠지만, 공안당국의 고문수사 장소가 저렇게 쉽게 뚫리는 것도 당황스러웠고, 또 거기서 차경감을 만나는 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차경감이 송변을 내리치고 이런 저런 쓸데없는 훈계를 늘어놓는 건, 영화의 진정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곽도원 씨의 연기는 훌륭했다. 다만, 그가 내뱉는 대사들이 우스꽝스러웠다. 6.25 때 부모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억지로 껴맞춘 듯 했고, 차경감이 왜 저렇게 빨갱이에 집착하는지도 사실 별로 감이 안왔다. 오히려 남영동에서 이경영씨의 과묵하게 표현되는 아우라를 가진 캐릭터가 오히려 더욱 와닿았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차경감이 감격스러운 듯 가슴에 손을 올리는 장면은 과하게 희화화 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 설정이 철저히 불필요한 설정이라고 확단한다. 감독은 그 설정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것으로 그렇게 픽션을 강조했던 그의 의도는 위선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는 류수영 씨가 분한 해동건설 회장 아드님의 대사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럴려면 국민소득이 몇배는 더 올라야 한다." 나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상관 관계지 인과관계가 아니다. "변호인"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드러나는 메시지 중의 하나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송변은 그의 스카웃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변호에 나선다. 그에 따르면 가난하다고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이성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상관관계를 극복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비용이 든다. 극 중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장된 부를 포기하고 보장된 안락을 포기해야한다. 심지어 그렇게 다 포기한다고 해서 바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포기하고도 끝없이 괴로움과 고난을 겪어야 하고, 추구하는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려야한다. 그래서 신념이 필요하고 진정성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점이 나는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자꾸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자보나 써갈겨대는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게 안녕하지 못한 너희들이 그런 용기를 가지고, 그런 비용을 전부 치뤄낼만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물음말이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해야 할 일이 있다.


  시내에 볼 일이 있었다. 어머님께 친구가 사과를 한 상자 보냈다고 전화로 말씀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차가 오토바이를 친 모양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현장에 달려갔고, 나 또한 전화를 끊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기다려야했다. 전화가 많은 모양이었다. 연결이 되고 구조상담원 분이 환자 분이 의식이 있는 지를 묻길래, 나 또한 현장으로 달려가봐야 했다. 다행히 의식이 있으셨다. 어떤 친절한 커플이 쓰러져 계신 아저씨의 안위를 챙기고 있던 중이었다. 쓰러진 아저씨는 어딘가로 자꾸 전화를 걸고 있었다. 친절한 커플이 이미 신고를 했다는 이야기를 조곤히 전하면서 아저씨를 안심시켜드렸다. 큰 길가 한 복판이어서 상황이 복잡했고, 근처에 파출소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나는 곧바로 파출소로 달려가 구조대원 한 분을 모시고 왔다. 구조대원의 지시에 따라 나는 어떤 어르신 한 분과 오토바이를 수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왔다. 상황이 정리되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쓰러져 계신 분께서 전화를 계속 전화를 걸었던 곳이 혹시나 119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에게 전화를 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통화하고자 그 상황에서도 힘들게 다이얼를 돌렸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오토바이는 배달용 오토바이였고, 아저씨는 집에 돌아가시는 중이었던 같았다. 그냥, 집에 있는 부인에게, 집에 있는 자식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전화를 하려고 하셨던 건 아닐까. 녹록치 않은 삶 속에, 다치기 까지 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신 건 아닐까. 많이 힘든 삶이지만, 다쳐서 미안하지만, 그저 보고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상이 과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 때 흘려 듣고 있던 노래가 마이클 잭슨의 "We are the World"라는 곡이었다. 그래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너무나 터져나와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병신처럼 흐느꼈다. 모르겠다. 그냥 분명 내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도,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는 다는 부끄러움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만큼 안이한 지금을 보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정말 병신처럼 흐느꼈다. 고맙게도 친구는 격려해주었다. 
  그저 어쩌다 지나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1년 후, 5년 후에는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는 걸 내 스스로가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일이 되면 이런 반성을 또다시 잊어버리고는 쓸데없는 일상사에 대한 불평만 잔뜩 늘어놓는데 집중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저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떠받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보다 더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단하고 숭고한 가치들이 내가 놓치면서 살아가는 바로 이 지금 속에 항상 상존해 왔던 건 아닌가 싶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One America.


  Barack Obama, Mr. President of United States of America, told about hope in DNC 2004. That was awesome. Very impressive. I think sometimes, in South Korea, hope is needed to say by anyone. Obama told, in 2004, "There are patriots who opposed the war in Iraq and there are patriots who supported the war in Iraq." There are very various ways in society. People have thought very differently. Somebody may tell me that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us is squashing up against North Korea and another may talk about importance of getting wealth. The other one may be gonna tell me that we should complete a global economic system as soon as possible. I don't know what's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us in the present time. Maybe we could talk, discuss, have a conference with ourselves at all. But that's gonna be a harsh one. People do not wanna talk, do not wanna trust other ones, do not wanna believe the thing they haven't known. I knew that's gonna be called a fairy or somethin'. But sometimes we need to trust other one even he or she is the most disgusting person to us or has too repulsive ideas to talk about. I understand the fact that a discussion could fully be a stupid thing. Nonetheless, we need to discuss anything important enough to bother us at times, even if that's the greatest crap. Listen to anyone's voice and talk about anything you want. Don't be angry, or everyone's gonna be angry. We are one people. That's the main reason why we must have a talk. In this way, we can and we should elaborate our thoughts, and we are gonna making a good decision. Maybe the decision is not that I do want, but if I fully talk about that, that's gonna be the decision that we do want. Talk about everything you want, but don't be angry and don't be emotional. That's gonna make us have a real nice answer. 



앞으로.


  철도 민영화라는 이슈에 대한 한 현직 철도 기관사의 인터뷰가 있었다. 바로가기 
왜 철도 민영화라는 이슈를 노조측이 포기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내용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회사 설립은 철도공사 이외의 운영사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첫째는 경영이 악화된 지방선들에 대한 민간개방을 추진하겠다는 국토교통부의 철도산업 발전 방안의 선례로써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코레일의 영업수익이 4천억원 정도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경부선 KTX 노선 빼고 모든 노선이 적자인데다, 수서발 KTX가 생기면 강동, 분당, 성남의 시민들이 수서로 몰리게 되므로 코레일의 운영수익은 더욱 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당연히 코레일은 수지가 맞지 않은 지방 적자노선의 운영을 점차 반납하게 된다. 이 지방 적자 노선들에 대한 민간개방을 추진하고자 하는 것이 국토교통부의 철도산업 발전 방안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다. 
  코레일이 운영을 포기한 지방 노선들에 대해 경쟁 입찰을 추진한다고 해도, 현재 한국에는 입찰에 참여할 만 한 기업들이 없다. 당연히 외국 기업들이 참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 방문 때 한국의 공공부문 시장을 외국기업들에 개방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것과 겹치는 사실이다. 프랑스 쪽에서 당연히 이와 같은 발표를 환영했다. 이미 프랑스의 베올리아사가 지하철 9호선을 통해 성공적으로 진출한 바 있다. 정부 측에서는 우리도 유럽의 철도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애초에 경쟁력에서 게임이 되지 않는 한국 기업이 발전된 유럽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수서발 KTX 자회사 또한 민영화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무리 지분을 100% 공기업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영진이 파트별로 외주화 하면 민간기업이 활동할 영역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하철 9호선이다. 이같은 외국기업의 참여가 점점 더 늘어난다면, 지분 매각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점차 앞으로 우리나라의 KTX 비용이 영국 수준으로 무려 5~6배까지 상승할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국토교통부의 계획에 따르면, 수서 KTX 자회사 설립으로 수익이 악화된 코레일은 지방 적자 노선 운영을 포기하게 되고, 이것을 민간에 개방하게 된다. 국내외 여건 상 개방된 노선의 운영은 당연히 해외 기업들이 맡게 될 것이다. 해외 기업들은 결국 다양한 루트로 수서발 KTX 자회사 운영에 까지 점진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지분 매각으로 인한 해외 기업의 국내 철도 운용으로 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몇 가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먼저 코레일이 공기업이라는 특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지경영이라는 것에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굳이 정부기관에서 코레일이라는 공기업으로 분리한 것 자체가 수익 추구 및 경영 효율화라는 목적에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코레일이 자체적인 결정이 아닌, 국토교통부라는 정부부처로 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결정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기업화 시킨 것 자체가 의문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요한 의사결정 구조는 정부의 의지에 달려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업화 함으로써 어떤 효율성과 공익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법하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볼 때 다시 한 번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자체가 "철도 민영화"라는 궁극적인 주장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먼저 "철도 민영화"라는 어구는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 공포와 맞닿아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철도 민영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이 수렴된 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있다고 해도 앞으로 진행될 과정의 형태가 정확히 그것과 일치하는 지는 확단하기 어렵다. 마치 코레일이 국토교통부에 절대적으로 좌지우지 되고 있는 현 상태에서, 그것이 과연 정말 추상적인 "공기업"의 형태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의문과 뜻을 같이한다고 본다. 그나마 "직접적인" 민영화의 영향력은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지방 적자 노선들이지, 수서발 KTX 자회사 자체는 아니다. 위의 내용에서조차 수서발 KTX 자회사 자체는 점차 혹은 잠재적으로 해외 자본의 개입이 있게 될 것이라는 우려 정도였다. 역시나 "잠재성"이라는 특징만을 내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방 적자 노선들은 어떠할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국토교통부의 지방 적자 노선들은 그저 관리를 포기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닌가 싶다. 그저 없어도 되는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공공 사업 공개라는 명분만 챙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지방 적자 노선들이 해외 자본에 공개된다고 하면, 세 가지 경우의 수를 볼 수 있다. 첫째, 지방 적자 노선들에 해외 자본이 들어와서 수익을 보게 되는 경우, 둘째, 지방 적자 노선들이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어떤 해외 자본들도 들어와서 사업을 하지 않는 경우, 셋째, 지방 적자 노선들에 해외 자본이 들어와서 여전히 적자를 보지만, 그 적자를 메꿔주는 것에 더불어 흑자까지 공공자금으로 지원이 이뤄지는 경우다. 첫째의 경우는 만약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경우, 오히려 공익의 측면에 도움이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노선을 해외 자본이던, 정부이던 일단 살려놨으니 매우 긍정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일단 해외 자본의 참여 자체가 없을 것이고, 기존 수요자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다른 교통수단이든, 다른 노선이든 어떤 것으로 수렴될 것이니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세 번째의 경우다. 우리나라에 있어왔던 여러 민자 사업의 경우, 민간 자본 참여 장려라는 명분 하에 실패가 뻔히 보이는 경우에도, 과도한 수요량 예측을 하고, 실패의 경우 발생하는 비용과 이익까지 전부 공공자금의 메꾸는 경우가 많이 있어왔다. 바로 그런 문제가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사실 지방 적자 노선 관리 또한 굳이 타협점을 찾자면 세 번째에서 사항을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남은 문제는 9호선의 사례에서 보 듯, 점진적인 해외 자본의 공공시장의 참여 증대이다. 먼저 베울리아사가 9호선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경험적으로 떠올린 사실은, 일단 9호선의 요금이 영국 수준으로 비싸지 않다는 것이었다. 올해 초 9호선 요금을 1550원으로 올리려고 했다가,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박원순 시장이 직접 나서 요금을 동결시킨 적이 있다. 9호선이 다른 호선들에 비해 조금 다르게 생긴 것은 있지만, 사용 시 특별한 불편함이나 편안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열차가 다니는 횟수가 너무 적다는 반발이 있어 그것 또한 서울시가 나서서 개선했다는 기억도 있다. 그것을 감안할 때, 급진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나라 공공교통요금이 굉장히 저렴한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로의존적인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여론이 공공교통요금에 굉장히 민감하다. 따라서 앞으로 점차 얼마나 변화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여론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경쟁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쨌건 매우 동감한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짠 하고 등장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외 시장에서 어떤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는 것은 립서비스에 불과할 것이다. 공공시장 개방에서도 국내 기업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굳이 코레일을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일종의 가치관의 문제다. 여기서 "민영화"라는 정치적인 어구가 의미를 찾는다. 애초에 문제의 시작이 국토교통부가 의도하는 적자노선정리라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다. "굳이 그렇게 적자노선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그렇게 경영효율화를 쫓을 필요가 있는가?". 나는 이번 철도 민영화 논쟁의 핵심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철도 노조가 패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하고 효과적인 논리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이 낳은 것은 (1) 고수익을 창출하는 자회사가 해외자본에 흘러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 (2) 수서발 KTX 이익이 분리됨으로써 코레일의 수지가 악화될 것이라는 불안감 (3) 수지가 악화된 코레일에 대해 적자노선 포기 종용과 이에 대한 해외 자본에 의한 잠식이라는 불안감. 이 세 가지가 바로 "민영화"라는 논조의 배경이다. 이러한 배경들을 양산한 근본적인 기제는 내가 보기엔 결국 경영 효율화라는 "가치관"이다. 국토교통부가 자회사 설립을 푸쉬하게 되는 공식적인 이유가 바로 적자 노선의 소거, 곧 경영 효율화다. "자회사 설립"이라는 형태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의미 또한 작은 경영, 분리 경영, 흑자 경영, 결국 경영효율화다. 그럼 왜 경영 효율화가 코레일에 필요하고, 철도 운용에 필요한 것일까? 왜 굳이 박 대통령은 프랑스에 가서까지 공공사업 개방을 통해 "경영효율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며, 왜 국토교통부는 그렇게까지 나서서 적자노선 철폐로 "경영효율화"를 하겠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이 설명되어야한다. 철도 민영화 라는 선전 어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논란을 수렴시키기가 어렵고, 설득을 위한 논리가 되기도 어렵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I'm a fan of Liverpool F.C.


  I'm a fan of Liverpool Football Club. I don't know Liverpool f.c. very well, but somethings in its history could be reasons why I decided to call me as an one of the kopites. The most famous event in recent years is maybe "2005 UEFA Champions League Final". In 2004-2005 season, Liverpool F.C. and its fans had a lot of confusing moments. Right before that season, They had to change their manager, Gerard Houllier, to Rafael Benitez who had been managing F.C. Valencia before then. In addition, they had to lose their star player, Michael Owen, who had gotten Fifa Ballond'or once before, to Real Madrid. And new players, Xabi Alonso, Luis Garcia, Djibril Cisse and so, are joined the team newly. Of course, they had Steven Gerrard but many fans of Reds couldn't hide their worried look. Really, in that season, Liverpool F.C. had not a great form to play. In Premier League, Chelsea F.C., Manchester United and even Merseyside rival, Everton F.C. were having a great abillity to be champion of the league enough. The Reds had a lot of troubles.
  But in the European Cup, though they almost came close to losing their chance to gotta a tournament ticket, they had a hero had a truly marvelous right foot. Steven Gerrard made the team go to Tournament in 8th December, 2004. In Champions League Tournament, they had to gotta real strong competitors, Bayer 04 Leverkusen, Juventus, and Chelsea F.C.. Each game was so close and so hard to watch as a fan of Reds. But finally they were allowed to gain entry in the 2004-2005 European Cup Final. However, the last competitor of big-ears is the A.C. Milan the best team in the Europe. In that times, Milan is the very best team in all European football club. they had Shevchenko one of the best scorers in football history, Kaka, yeah that Kaka as you known, Paulo Maldini, one real hero of Italian football, the combination of Gattuso, Pirlo and Brazilian goal keeper Dida. The squad of Milan is a real fear as itself. 
  According to anticipations many experts expected, when half-time whistle was blown up, Milan already got 3 points. Three-null. That was just a half-time result of final. People began to say that it was only huge that Liverpool F.C. had got a chance to play a final game with Milan. It's ridicule. But I don't know what happened in half-time break. In  moment that could never be a long time, in almost 5 minutes, the Reds got three goals and the game was tied in a flash. A real hero of the Reds, Steven Gerrard, made the first and third goal of Liverpool and showed a goal ceremony that most people know Liverpool F.C. can never forget in the first goal moment. The game were in extra-time and in penalty shoot-out. In the end, the goal keeper of Reds, Jerzy Dudek, blocked shooting of Shevchenko, the Liverpool F.C. got big-ears. 
  Never be a forgotten one that match and those stories. This drama made me a huge fan of the Reds. I love that Liverpool F.C. is not always a strong team. The Reds always have hard-to-look games and they've been failed in many games. But sometimes they may gotta win. I think that part is the important one why I'd like to be a kop. Still my google has said to me that when is gonna be the game night of Liverpool. I'd love to. And also I'm gonna get checking football broadcasting calender.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An apparent one.


  A few days ago, I watched a movie, Namyeong-dong 1985. That movie said about putting a person, a famous one now, to the torture in various ways. It described scenes of torturing very minutely. So, I think it could be kind of a cruel thing to feeble people. But, it could be not a crazy one, just a realistic one. 
  Although, I'm not a man from the time of Namyeong-dong, I can feel it indirectly from my father who have been interrogated in that time. The fact that I can say anything I do wanna say is really important and grateful I think. Though just a simple thing, we needed a very long to get a chance to do that. Sometimes we've really forgotten that past too easily. I know not forgetting that is not a easy one. That's so to me, too. Maybe everyone did that, I had a thought that if I were in there, how many days I could hold that kind of tortures. Just 1 hour or just 2 hours?
  I'm not just wanna say thanks to people in past. What can I do for this time? This is my question for me. I don't know well. The movie was cruel, and I'm shocked but I have nothing to answer that kind of questions. The thing only I have is a just blur one. Maybe my job I have to do is changing that blur one to more apparent one.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Ten years, that's damn long to me.


  When I was in a company, one of my managers, appreciated as a very excellent expert in my team, said to me that who's gonna get a success. His idea was simple. According to him, the most crucial ingredient of success is in the moment that being anxious to try anything in really long time. In short, wanna get a success, must do hard in very long time. He said, that time has to be at least 10 years. He talked to me "Anything do really hard for 10 years, you can get an any result that could be called a success."
  Frankly speaking, the moment that I heard his idea about success, I absorbed it just abstractly. I really agreed with that idea, but it's a just rational thing and that's all. True part of myself really didn't reach to the genuine value of his idea in that time. Maybe still, too. However, the times that recent days, I do admit and understand his idea a little bit more. It really does. Something, consisted of truly valuable endeavor and has been accomplished in a very long time, is the most difficult and important thing in the world. To do whatever in the world, really I have to prepare for that fully and gotta sincere willingness for that, too. I don't know maybe the fact that I've got failures and troubles in a row recently, could be a reason that I've recalled his best idea of success yet again. But anyway I really have much time to think about an idea that he said to me, today.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왜 고양이는 항상 죽는가.


  어떤 고려대생이 학교에 커다랗게 대자보를 붙였다고 한다. 참으로 정성이 갸륵한 일이다. 주요 내용은 철도 파업으로 4,213명이 직위 해제 된다는 데, 너님들은 어째 잘 먹고 잘 살고 계시냐는 물음이었다. 대자보를 쓴 학생이 경영대 학생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성이 담긴 그의 글씨체에 한 번 더 놀랐다. 뭐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불평들이었기에 대단히 감명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고민을 담아놓은 것 같아 귀를 기울여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작금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이라도 가져보고자 철도 파업에 한 번 생각해보기로 했다.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은 듯 했다. 첫째, 지금의 파업을 불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둘째, 정말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은 민영화로 이어질 것인가. 이 두 가지 쟁점에서 사측과 노동자측은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과연 지금의 파업을 불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주로 사측(혹은 파업을 반대하는 입장)은 이번 파업이 철저히 불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노동자측이 내걸고 있는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반대는 파업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근로조건개선과는 관계가 먼 단순한 정책 반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부정책 반대를 이유로 파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국민을 볼모로 한 협박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번 파업은 불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조측(혹은 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은 가장 촉망받는 라인이자 장차 훌륭한 캐시카우(cash-cow)가 될 수서발 KTX를 자회사 설립을 통해 분리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현재 적자에 허덕이는 코레일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며, 이것이 틀림없이 근로조건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는 관점이다. 따라서 이번 파업은 정당한 파업권의 행사이며, 더 나아가 파업권 행사에 필요한 조건들(파업계획의 사전 공시 등)을 최소한 적으로 갖추었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정말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이 민영화로 이어질 것인가.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수서발 KTX는 민영화가 아니다", "민영화가 된다면 철로에 드러누워서라도 막겠다" 라는 호기로운 패기를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천명했다. 실제 지난 5일 공개된 수서발 KTX 운영안에 따르면 코레일 지분이 41%로 확대되고, 공공자금 참여가 부족 할 경우 필요한 자금은 정부 운영기금이 사용되며, 주식의 양도, 매도 대상이 전부 정부, 지자체로 한정된다. 더 나아가 코레일이 흑자를 거둘 시 코레일의 지분을 꾸준히 늘린다는 것이다. 사측은 민영화가 될 여지를 사전 차단했다고 덧붙였다. 
  노조 측은 일단 별도 법인화 자체가 민영화를 향해가는 과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일단 코레일이 지분을 늘릴 만큼 향후 대단한 흑자가 기대되지도 않을 뿐더러, 코레일의 지분이 늘어났고, 동시에 그외 공공기금이라는 특성 상 정부의 상명에 따른 임의적 의지에 따라 향후 정관이 충분히 변경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6개월 만에 분할 반대에서 분할 찬성으로 바뀐 코레일의 입장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최근 박 대통령이 재가한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에 따르면 이 같은 사업에 국제 자본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고 있다. 
  이 같은 치열한 입장의 대치는 더 큰 문제를 가져왔다. 대자보에서 언급한 것처럼, 파업이 지속되자 코레일 사측에서 단호하게 파업 참가 4,213명을 직위해제했고, 방금 1,585명을 추가로 직위해제 할 것이라고 통보한 것이다. 이제 파업 참가자들은 전부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다. 사측은 다시는 이런 협박을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사례를 남기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밝혔다. 

  사실 내가 이래저래 뭐라 논평할 입장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파업의 불법성이야 공명정대한 법관님들이 판단할 일이고, 철도 민영화의 경제적 파급력은 머리회전 빠른 경제연구원님들이 판단하실 일이다. 그래도 굳이 관심을 가져보라고 대자보에서 호소하길래 그래도 생각이라도 해보려고 한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볼 때, 최소한 정치적 명분은 노조 측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수서발 KTX의 자회사 설립이 근로조건에 미칠 영향은 절대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다. 간접적이고 잠재적이어서 추측 이나 우려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불법적 파업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근로조건개선과의 연관성을 설명해야하는 의무가 노조 측에게 갈 뿐더러, 그것을 설명해내는 것은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길어진다. 이것은 제대로 대중에 전달하기도 힘든 내용일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될 것 같다. 실제로 연관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입증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코레일 측이 구체적인 운영안을 공개하면서 철도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가 단순히 정말 구호로만 남을 가능성까지 안게 되었다. 현재로써는 그 운영안이 민영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단하기가 어렵다. 자회사라고는 하지만 철저히 공적자금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안까지 나온 상태다. 그리고 자회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코레일의 운영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다른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번 대단위 파업을 정당화 할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노조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관을 바꾸던, 해외자본참여가 허용되던, 대통령 말에만 따르던, 그것은 전부 "잠재성"을 가진 이야기일 뿐이고, 그 잠재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고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이다. 아무리 심증이 가득하다고 해도, 그건 언제나 심증일 뿐이다. 이것은 "민영화"라는 정치적 구호를 실체도 없이 사용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코레일이 재빠르게 직위해제를 단행한 것도 노조측이 지닌 명분이 그리 단단하지 못하다고 보아서 일 것이라고 본다. 그나마 중립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언론에서도 철도 파업의 정치적 명분 혹은 정당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을 나는 때때로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대단위 파업이지만, 열차 운행에 큰 피해를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만큼 대단한 여론의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거기에 철도에 드러누워서라도 민영화를 막겠다거나 (물론 립서비스이겠지만)부모의 심정으로 임직원들을 기다리겠다는 언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코레일 사장은 그나마 남은 여론의 동향마저 단호하게 기울인 것 같다. 더 나아가 엄청난 단위로 직위해제를 추진하면 노조측의 단합력이 스스로 붕괴되고, 그 갈 곳 없는 잔재들을 어차피 자신들이 "좋은 조건"에서 충분히 재흡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측이 판단했을 것 같다. 
  파업이란 건 치킨 게임이다. 어차피 장기적으로 갈 수 없다. 나는 이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나라의 산별 노조 식의 파업 게임이 제왕적 대통령 중심 혹은 국가중심의 우리나라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전국연합노조 따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냥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면, 꼭 민영화는 아니더라도 민영화 그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되가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노조 측이 느끼는 불안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이야기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렇게 훌륭한 먹이감을 자본들이 결코 놓칠 수 없고, 그 자본들이 내어놓는 "수치"라는 것에 정치인들이 매혹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 정도 랄까. 아무리 그들이 그런 불안감을 설득하려고 해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사측의 이야기에는 너무나 단호하게 막힐 수 밖에 없다. 어쨌건 쟁점이 되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체적이고 단호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여론에게 매혹적이다.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건 언제나 정적일 수 밖에 없으니 그럴 것이다. 
  노조 측이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구체적인 사실에 지고, 다음의 순간에는 조용히 결국 그 불안감이 현실화가 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밀려온다. 결국 노조들이 내놓고자 하는 메세지는 국가와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손의 뽑고, 우리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정부와 국가를 바로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Gravity, not about the movie.


  I've watched the movie "Gravity". It was great. Awesome. Runnin' time of the movie was so interesting to me. Any way, that was awesome. But I'm not about to talk about that movie. I just wanna say something about gravity little differently, not an astronomical one. Maybe that's gonna be a confused one because I would talk some meanings of "gravity", not in a dictionary, just in my simple metaphor.
  Sometimes - yeah, right, sometimes again. -, I've got aware of gravity somethin', that's not a physical thing, definitely a personal thing. That's laziness. Every time when I've waken up, it has been horrible, I really have not wanna wake it up. In every little time of my days and nights I really don't wanna do anything but just staying or laying quietly. I don't wanna do my homework, do my laundry, wash the dishes, go to a store, study or read something, and at all. But I really have to do those works. So, frequently, I really want to have a servant or a lot of money and there is a somebody to take my all jobs and he get done with all those things excellently. I think that kind of thoughts are like gravity. Once I got lost my conscious in a little bit, that kind of gravity would took me and laid me down. 
  If I wanna be doing something, I really have to grab my conscious or my will power intensely. Otherwise, I would be tugged laziness hell. That's a horrible place I don't wanna go. If I don't wanna go there, I really should get my own orbit. And to make that, I should use my inner energy only. As though, a space ship should speed up to 11.2km/s to get out the earth gravity, I should get that velocity by my will power, too. So, out of sudden, I've got an idea that maybe laziness could be one kind of gravity in my mind. That's all. Not is that a special thought, I know. But today, like other days, I've got some crappy things miscellaneous.



Barack Obama, Speech at 2004 DNC.


  Now, don't get me wrong. The people I meet - in small towns and big cities, in diners and office parks- they don't expect government to solve all their problems. They know they have to work hard to get ahead, and they want to. Go into the collar counties around Chicago, and people will tell you they don't want their tax money wasted, by a welfare agency or by the pentagon. Go into any inner city neighborhood, and folks will tell you that government alone can't teach our kids to learn; they know that parents have to teach, that children can't achieve unless we raise their expectations and turn off television sets and eradicate the slander that says a black youth with a book is acting white. They know those things. 

  자,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시골과 도시에서, 작은 식당과 큰 연회장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정부가 전부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열심히 일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시카고 주변의 칼라 카운티들(the Collar Counties)에 가보십시오. 그곳의 사람들은 복지기관이던, 국방부이던 간에 자신들의 세금이 낭비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시내 한복판에도 가보십시오. 그곳의 사람들은 정부 혼자서 자신들의 아이들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없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이들이 가진 기대를 높이지 않은 채로, TV를 끄지 않은 채로, 흑인 아이들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백인 흉내 내는 것이라는 비방을 근절하지 않고서는 아이들이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People don't expect government to solve all their problems. But they sense, deep in their bones, that with just a slight change in priorities, we can make sure that every child in America has a decent shot at life, and that the doors of opportunity remain open to all. They know we can do better. And they want that choice.

  사람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에서의 작은 변화가 미국의 모든 아이들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기회의 문을 향한 제대로 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그들은 뼛속 깊은 곳에서 부터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더욱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런 선택을 원하고 있습니다. 



  John Kerry believes in America. And he knows that it's not enough for just some of us to prosper; for alongside our famous individualism, there's another ingredient in the American saga, a belief that we're all connected as one people. If there is a child on the south side of Chicago who can't read, that matters to me, even if it's not my child. If there is a senior citizen somewhere who can't pay for their prescription drugs, and having to choose between medicine and the rent, that makes my life poorer, even if it's not my grandparent. If there's an Arab American family being rounded up without benefit of an attorney or due process, that threatens my civil liberties. 

  존 케리는 미국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어떤 사람들만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우리의 개인주의와 함께 미국의 영광을 만들어 낸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국민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시카고 남쪽에 읽을 수 없는 아이가 한 명 있다면 그것은 제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저의 친자식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만약 어딘 가에 처방된 약을 살 돈이 없거나, 약 값과 집세 중에 선택해야만 하는 노인이 한 분 계신다면, 그건 제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분이 저의 친조부모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만약 변호사의 도움이나 정당한 절차도 없이 피검된 한 아랍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저의 시민적 자유를 위협할 것입니다. 

  It is that fundamental belief : I am my brother's keeper, I am my sister's keeper that makes this country work. It's what allows us to pursue our individual dreams and yet still come together as one American family. 

  저는 저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이고, 저의 자매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 지닌 각자의 꿈들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를 하나의 미국 가족으로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The pundits, the pundits like to slice-and-dice our country into Red States and Blue States; Red States for Republicans, Blue States for Democrats. But I've got news for them, too. We worship an "awesome God" in the Blue States, and we don't like federal agents poking around in our libraries in the Red States. We coach Little League in the Blue States and yes, we've got some gay friends in the Red States. There are patriots who opposed the war in Iraq and there are patriots who supported the war in Iraq. We are one people, all of us pledging allegiance to the stars and stripes, all of us defending the United State of America. 

  전문가들, 바로 그 전문가들은 우리 나라를 빨간 지역, 파란 지역으로 잘게 썰어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빨간 지역은 공화당원들을 위한 곳이고, 파란 지역은 민주당원들을 위한 곳입니다. 하지만 저도 그들을 위한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파란 지역에서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빨간 지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도서관들을 헤집는 정부 요원들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파란 지역에서 아이들 리그 시합의 코치를 맡고, 우리는 빨간 지역에서 동성애자인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애국자들도 있고,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애국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한 국민입니다. 우리 모두는 국기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고, 우리 모두는 분명 힘을 합해 우리 조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I'm not talking about blind optimism here - the almost willful ignorance that thinks unemployment will go away if we just don't think about it, or the health care crisis will solve itself if we just ignore it. That's not what I'm talking about. I'm talking about something more substantial. It's the hope of slaves sitting around a fire singing freedom songs; the hope of immigrants setting out for distant shores; the hope of a young naval lieutenant bravely patrolling the Mekong Delta; the hope of a mill worker's son who dares to defy the odds; the hope of a skinny kid with a funny name who believes that America has a place for him, too. 

  저는 눈 먼 낙관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실업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거나, 그저 건강보험위기를 무시하기만 하면 그것이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는, 그런 억지스러운 무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좀 더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닥불 가까이에 둘러 앉아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노예들이 지닌 것과 같은 희망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가를 향해 출발하는 이민자들이 지닌 것과 같은 희망이며, 그것은 메콩 강 삼각주를 용감하게 순찰하는 젊은 장교가 가진 희망이고, 감히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 지닌 희망이고, 특이한 이름을 지닌 깡마른 소년이 바로 이 미국의 땅에 자신이 있을 곳이 틀림없이 있다고 믿는 바로 그런 희망입니다.  

  Hope in the face of difficulty. Hope in the face of uncertainty. The audacity of hope.

  어려움에 마주선 희망이고, 불확실함에 마주선 희망이며, 바로 가장 담대한 희망 입니다. 

  In the end, that is God's greatest gift to us, the bedrock of this nation. A belief in things not seen. A belief that there are better days ahead.

  결국 바로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선물이자 이 나라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나은 날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I believe that we can give our middle class relief and provide working families with a road to opportunity. I believe we can provide jobs to the jobless, homes to the homeless, and reclaim young people in cities across America from violence and despair. I believe that we have a righteous wind at our backs and that as we stand on the crossroads of history, we can make the right choices, and meet the challenges that face us. 

  저는 우리가 우리의 중산층에게 안정을 줄 수 있고, 일하는 가정에 기회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실직자들에게 직장을 제공해 줄 수 있고, 노숙자들에게 집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폭력과 절망으로 부터 우리의 젊은이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등 뒤로 올바른 바람을 받으며 역사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낼 수 있고, 우리 앞에 닥친 과제들을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from Barack Obama
2004 keynote address at the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in Boston

Script : AmericanRhetoric.com
Translated by carl
주요 부분 발췌 및 의역
Click to Obama 2004 Youtube video



때때로 우리는 우스꽝스러워진다.


  친구들과 한가로이 대학교 광장에서 와인을 마시는 날이었다. 한가로운 광경을 즐기며 실없는 농담들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친구들에게 내가 일했던 곳에서 모셨던 분께서 내게 해주셨던 이런 저런 조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대략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치열한 노력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서 이룩하는 그 어떤 것을 느끼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모 세대의 잘못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세대들은 자신의 부모세대들로 부터 훌륭하고 바른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먹고 살기가 조금 풍요로워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식 세대에게 올바른 교육보다는 과잉의 관심과 보호만을 제공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셨다. 뭐 일단 나는 부모세대가 아니기도 했고, 당시에도, 지금에도 내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만한 특별히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 이야기가 내게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분의 지적이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내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 두 명 중 한 명은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느끼는 바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실 별 대수롭지없지 않게 흘러가는 이야기 중 하나였거니 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한 명은 굉장히 크게 반발했다. 조금 과장해서, 그 따위 생각들 때문에 지금 사회가 이런 모양새라든가, 이래서 노인들이 사회에 도움이 안된다거나 할 정도로 극렬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굉장히 "진보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친구가 왜 그렇게 비난하는 지도 알 것만 같았다. 게다가 당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아무래도 젊은 세대들에게 희생이라던가, 고통이라던가, 노력이라던가 하는 일종의 것들을 뭔가 조금은 과도하게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일종의 "의지 드립" 때문에, 젊은이들이 크게 반항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런 반항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 친구의 말이 결코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마냥 치열함만 가지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거나, 지금의 여러 현실적인 고통들이 단지 무조건적으로 버티거나 견뎌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친구의 그런 극렬한 반응은 어찌보면 아이러니 했다. 녀석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어른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윗 자리에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명문대 의대생이었다. 녀석이 특별히 현실적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친구들 중에서도 녀석만큼의 경제적 환경을 지닌 친구는 손 꼽을 만 했다. 어찌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만도 했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조금은 객관적으로 녀석이 "어려움"이란 걸 손에 묻혀보기는 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하긴 녀석이 오히려 반대로 말했다면 훨씬 더 재수가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다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 친구의 반응에 당황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정말 진정으로 녀석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세속적인 환경의 차이 따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좋아하는 친구이고, 지금도 때때로 재미있게 만나고 하는 친구지만, 나는 녀석을 오랜 시간 봐오면서 녀석이 진정으로 자신 만의 무언가를 위해 노력한다거나, 거기에 따르는 현실적 혹은 추상적인 어려움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의대에 들어갔겠지만, 녀석이 얼마나 잘 숨겼는지는 몰라도 나는 녀석이 "의대"라는 목표를 위해 적어도 억지로라도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고된 공부의 순간들을 이어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두가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모두가 별로 안 힘들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힘들고 고되 보이는 사람도 사실 살면서 손 꼽을 정도로 밖에 보지 못했고, 그 또한 그 사람의 일생의 어떤 일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분의 이야기에서 바로 그런 것을 느꼈다. 적어도 어린 내가 보기에 그 분은 정말 말도 안되는 많은 과정들을 이를 악물고 버텨오셨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뭐 모든 순간을 이를 악물고 버텨내며 고통스럽게 보내는 건 말도 안되겠지만, 최소한 어떤 꿈이나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벼텨내고자 하는, 수 많은 노력과 시도는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는 그 분의 조언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객관적인 비교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어려웠던 과거의 역사를 지내오신 분이고, 환경이 달라지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의 자세나 가치관이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와 친구들은 밥 굶을 걱정을 하면서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반드시 꼭 그래야한다고 억지 부리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 본인들 모두가 자신의 가능성의 발현을 위해 고통스러운 정진의 과정과 현실적 어려움들을 더욱 치열하게 버티고 노력하는 것은 충분히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냥 문득 떠올랐다. 그 친구 녀석이 며칠 전 내게 자신은 자신이 지향하는 의지를 혼자 세울 만한 그런 인간이 절대 못된다고 태연하게 단언하던 게 생각나서 말이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 모두는 우스꽝스러워진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A stupid thing.


  It may be euphemistic to say "Know Thyself", a famous aphorism in ancient Greece, instead of saying "Know stupid yourself. So, it's damn hard to find genuine myself. The thing what I've truly found is genuine myself, but only thing I've seen is a stupid, It seems not the way it is.  


  "Know Thyself", an ancient Greek aphorism, actually may be an euphemistic expression for "Know how stupid you are". That's the reason why it's hard to get real myself. The thing what I've found is real myself but the only thing I've found is a stupid idiot not seemed to be myself. 



I feel like I got some shortages.


  Enough is great. That would be a state desired by every person. Unfortunately, that's a state that no one could reach. Maybe that's the reason why we wanna get enough all the time. But sometimes, I feel little different. Sometimes, definitely sometimes, I had got an idea when I got a smoke or something. A state of "Not Enough" may be a good thing for everyone. If I'm in enough, I don't do anything. There is no reason made me do something. Probably, just fine. I need nothing to make what might be a great one. I think it's boring. I think sometimes, definitely sometimes, couch-potato may not be an always good one. Same state, same condition, same song and every little part of life being always same is so damn boring. So if someone realize that he or she is in a state "not enough", "shortage", "lack" or kind of those things, surely he or she is gonna try somethin' to reach the enough situation. I think that's gonna be the most interesting moment in the world. The process to make something is always marvelous and memorable. So sometimes, definitely sometimes, falling in a situation called "not enough" or feeling the emotion of "not enough" could be a good thing for anyone "enough". 



2013년 12월 8일 일요일

Movies are always great.


  Movies are always great. They always represents good things, for example, happiness, laugh, overcoming brutal conditions whatever they got, self-conquest, and also many other things. The time when I watched movies, I felt a lot of emotions, definitely in a better way. But also I got a sadness. Because I'm not great, I'm not happy, and I couldn't get over the many problems I had. I think many of you guys feel same thing at all. But we cannot share those feelings. There are so many obstacles and so far a way that I couldn't see any of you guys and you too. So, though the movies make me crazy or sad, movies always gotta be great and always happy or something. In this way, certainly, you guys can talk about the movies, I can hear that, and we can gotta talk, hang out, or share anything good stuff. I'm afraid so, that's the way it is. So movies are always great. Although I'm sad, I could talk and I wanna listen. I like those movies of good things.


That must be kind of crap in English. But I'm practicing, practicing now. That sucks, but I've got to and I'd like it in a degree. I've thought I'm freakin' ridiculous.



2013년 12월 2일 월요일

얼굴이 희멀건 그 녀석.


  군 복무 시절이었다. 여러 후임 중에 흔히 말하는 "섹드립"에 능한 후임이 있었다. 하긴 녀석이 "드립"에 능했다기 보다 자신의 과거 경험들을 우스꽝스러운 재롱에 섞어서 나이스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것이 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녀석이 우러러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시기를 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일본인 순사가 어울렸을 것 같은 얼굴에,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 희멀건 피부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걸 그룹이 나오는 TV에 아래에 바짝 엎드려 치마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모두는 폭소를 터뜨렸고, 녀석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강력하게 자신은 무조건 "처녀"와 결혼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결혼할 여자가 처녀가 아닌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록 자신은 총각이 아니고 휴가를 나갈 때마다 안마방과 사창가를 전전하지만, 절대 자신의 여자친구 혹은 결혼할 여자는 처녀여야 한다고 과장을 섞어 주장했다. 반드시 자신의 여자의 첫경험은 자신이어야 한다. 그것이 녀석의 모토였다. 녀석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을 법한 다른 부대원들 마저도 녀석에게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며 힐난했지만, 녀석은 강도를 더 높여 주장했다. 그런 녀석의 반응에 언제나 내가 있는 생활관은 웃음바다였다. 
  나는 녀석의 말이 완전한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녀석이 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캐릭터였고, 그것이 녀석이 군 생활에서 겪었을 스트레스의 해소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어떤 개인적인 존경이나 애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쁜 여자"가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녀석은 때때로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구보를 꾸준히 뛸 수 있는지 묻곤 했다. 자신도 자신의 배가 보기 좋지 않다는 걸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매주 주말이 되면 녀석은 다른 모두들 처럼 침낭을 뒤집어 쓴 채 누워서 TV를 보는 것으로 지냈다. 
  군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제대만 하면 TV에 난무하는 걸 그룹들 처럼 귀엽고 예쁜 여자 후배를 "따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보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예외라고 억지부릴 생각은 없다. 그런 생각 자체가 불결하고 저속하다는 고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의(혹은 우리의) 자신감이 아쉽다. 매일 24시간을 "이쁜 여자"를 만나서 자고 싶다는 이야기만 해대는 그들이(혹은 우리가) 정말 그렇게 "이쁜 여자"를 꼬셔서 자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이쁜 여자"도 틀림없이 사람일 텐데, 게다가 이쁘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알 텐데, 뭐가 좋다고 덜 떨어진 남자를 만나겠는가. 그것도 저런 불결한 욕망 만으로 가득 찬 인간들을 말이다. 
  농담일 뿐이었겠지만, 그 후임 녀석의 그런 캐릭터에 담긴 생각이 아쉽다. 정말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투자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런 저속한 생각을 갖지도 않게 되겠지만, 그들이 그토록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이쁜 여자"에 꿀리지 않을 만큼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침낭 속에 짱박고 있는 것 말이다. 바로 안주(安主)말이다.



Earth song.








  마이클 잭슨의 1996년 내한 공연 때 일이다. 그가 Earth Song이라는 곡을 열창할 때, 팬 한 명이 무대 위로 뛰쳐올라와 그를 껴안았다. 마침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공연 장치 위에 있을 때라, 보안 요원들은 그를 제지하지 못했고, 2분 여의 시간 동안 그 팬은 잭슨을 껴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arth Song 라는 곡에서 분명하게 알아들었던 부분은 "I used to dream. I used to glance beyond star." 밖에 없었다. 사실 가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곡 내내 이어지는 잭슨의 절규와 호소만 보아도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내한 공연에서 잭슨은 뛰어들어오는 팬을 막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예정된 이벤트 였던 것 처럼 그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공연 장치에서 행여 팬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꽉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팬의 허리를 꼭 감싸쥐었다. 공연장치가 지상으로 내려 왔을 때, 잭슨의 손을 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했던 그 팬의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 후 보안 문제를 가지고 옥신각신 다투고 있을 때, 잭슨이 "우리가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 다며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시대를 공유하였다. 그에게는 역사적이고 특별한 시간들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범상한 시간들이었을 뿐이다. 이집트 혁명이 한창 발발하고 있을 때, 긴박한 시간들이 조여오며 그들에게 흐르고 있을 때, 나는 태평하게 열람실 한 구석에 앉아 시답지 않은 전공시험공부나 붙잡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이 역사적인 메시지들을 공연을 통해 전 세계에 보내고 있을 때,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어떤 평범하고 바보같은 시도들에 매몰되어 있었을까. 부끄러운 하루하루의 나날들이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특수화의 끝은 느슨한 죽음 뿐


토쿠사

: 소좌,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나같은 남자를 본청에서 빼온거죠?


쿠사나기 소좌

: 네가 그런 남자이기 때문이야. 부정규 활동 경험이 없는 형사 출신에 더구나 기혼. 전뇌화하기는 했어도 뇌는 잔뜩 남아 있고 거의 생 몸. 전투단위로서 아무리 우수해도 같은 규격품으로 구성된 시스템은 어딘가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게 되지. 조직도 사람도 특수화의 끝에 있는 건 느슨한 죽음 뿐 그것 뿐이야. 



『The Ghost in the Shell』 중에서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잠언인<너 자신을 알라>는 사실 <너 자신이 병신임을 알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인 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어려운 거지. 찾는 거는 ‘나’인데 자꾸 병신만 보이니까 내가 아닌 거 같거든.”


더 딴지 - 읽은 척 매뉴얼 <데미안>



You don't see what I mean at all.


  "You ought to go to a boys' school sometime. Try it sometime," I said. " It's full of phonies, and all you do is study so that you can learn enough to be smart enough to be able to buy a goddam Cadillac some day, and you have to keep making believe you give a damn if the football team loses, and all you do is talk about girls and liquor and sex all day, and everybody sticks together in these dirty little goddam cliques. The guys that are on the basketball team stick together, the Catholics stick together, the goddam intellectuals stick together, the guys that play bridge stick together. Even the guys that belong to the goddam Book-of-the-Month Club stick together. If you try to have a little intelligent-"...


... I said no, there wouldn't be marvelous places to go to after I went to college and all. Open your ears. It'd be entirely different. We'd have to go downstairs in elevators with suitcases and stuff. We'd have to phone up every-body and tell'em good-by and send'em postcards from hotels and all. And I'd be working in some office, making a lot of dough, and riding to work in cabs and Madison Avenue buses, and reading news papers, and playing bridge all the time, and going to the movies and seeing a lot of stupid shorts and coming attractions and newsreels. Newsreels. Christ almighty. There's always a dumb horse race, and some dame breaking a bottle over a ship, and some chimpanzee riding a goddam bicycle with pants on. It wouldn't be the same at all. You don't see what I mean at all."


J. D. Salinger,『The Catcher in the Rye』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하자고 친구를 불러냈다. 진토닉이 마시고 싶다며 칵테일 바에서 한 잔 한 뒤, 바로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별히 근황을 물을 것도 없었다. 항상 그러던 대로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채웠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술을 먹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술을 멀리하는 얼마나 건강한 생활을 누렸는지를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번 달 초에 글 쓰는 친구를 만나는 김에 맥주를 마셨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최근 얼마나 꾸준히 구보를 뛰었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침 공기를 마시는 상쾌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구보를 뛰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그저께 부터 추워졌다고 뛰지 않았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최근 내가 다시 얼마나 웨이트를 꾸준히 하는지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건강한 신체 단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시작한 지 2주나 됐는지 모르겠다.
  이야기 중에 나는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독서와 공부에 몰입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보다 정교한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얼마나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 강조했다. 아, 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읽는 척을 해온지 한 달도 안된 것 같다. 

  무언가 열심히해왔다고 대단히 착각하게 되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려 찾아오는 것 같지 않다. 그 만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러한 꾸준함을 끊임없이 이어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어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까?


  친한 형님과 부대찌개를 저녁으로 먹은 날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벤치에 앉은 담배 연기 속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르던 중, "어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까?"라는 주제가 나왔다. 나는 농담과 과장을 섞어가며 몇 가지 조건을 만들어 형님께 보여드렸다. 


  1.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
     i) 술, 담배를 멀리한다. 특히 술을 즐기지 않는다. 
     ii) 복잡한 유흥가 혹은 시가지를 꺼려한다. 

  2. Facebook을 사용하지 않는다. 
     i) 계정만 있을 뿐, 특별한 활동이 없는 것은 예외로 한다.
     ii) 프로필 사진은 게재되지 않은 것을 최고로 치며, 풍경, 정물 등을 차선으로 친다.

  3.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다. 
     i) 사용한다 하더라도 프로필 사진, 상태메시지, 카카오스토리가 없다. 
     ii) 개인적인 용도의 채팅 갯수가 100개를 넘지 않는다. 
     iii) 피처폰을 사용하는 사람은 최상으로 본다. 

  4. 셀카를 찍지 않는다. 
     i) 찍더라도 개인적으로 소장 할 뿐 여기저기 게재하지 않는다. 
     ii) 공공장소에서 시도하지 않는다. 

  5. 각종 비속어 사용이 없다. 

  6. 자신만의 확고한 커리어와 목표가 있다.

  7. 다른 모든 모든 조건을 합한 것 보다 6번 조건이 우월하다.


  완전히 웃기는 기준이다. 형님은 이 조건을 듣고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형님은 내게 그거 참 말이 된다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런 게 어딧냐고 소리치셨다. 자기는 술, 담배도 즐기고, 카카오톡도 사용하는데 그럼 안 되는 거냐고 형님은 내게 따졌다. 그래서 나는 천연덕스럽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형님, 세상에 절대적으로 맞는 기준 같은 건 없어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기준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죠."

  그렇게 담배연기 속에서 낄낄거리며 형님은 내게 "그런 여자"를 만날 수나 있겠냐고 허심탄회하게 내리쉬었다. 나는 태연자약하게 마지막 한 타를 날렸다.

 "형님. 그런 여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근데 절대 만날 수 없을 거에요. 왜냐면, 그런 여자들은 전부 안 이쁘거든요."




  그 말을 담배연기 속에 날리고는 형님과 나는 다시 한 번 마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그렇게 낄낄거리는 담배연기와 함께 하루를 저물었다.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쥐가 사람을 잡는가. 사람이 쥐를 잡는가.


  쥐 덫 박스에 있는 사용방법을 읽었다. "본 트랩은 쥐의 좁은 시야와, 항상 벽에 접근하여 달리려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유리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좁은 시야와 벽에만 붙어서 달리는 건 비단 쥐 뿐만이 다닐텐데 말이다. 쥐 덫에 걸리는 쥐와 쥐 덫을 놓는 나는 어디서 갈라지는 것일까 궁금했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다.


  훈련소 시절이었다. 훈련소에서는 훈련병들에 대한 통제가 굉장히 엄격하다. 모든 시간을 통제했고, 모든 행동을 통제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서 긴장하고 있는 훈련병들은 그 긴장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수 백명은 족히 될 만한 많은 숫자의 훈련병들을 하나처럼 통제하려다보니 조교들은 전부 호랑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대식 예절을 처음으로 배우던 시절이다 보니 모든 것을 FM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훈련병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대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때때로 조교들은 훈련병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로 화장실 사용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건 정말 고문이었다.
  막사에서 대기하는 때가 가장 문제였다. 훈련병들은 아직 군대의 체계에 익숙치 않기 때문에 항상 긴장 상태에서 대기한다. 바로 이런 때에 화장실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이런 때에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텅 빈 복도를 혼자서 지나, 공포 그 자체인 조교에게,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냐는 것을 골자로 한 족히 일곱 문장은 될 만한 대본을 통째로 외워 가야했다. 대본에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완벽할 때까지 조교한테 욕을 얻어 들으며 반복 재생을 해야했고, 그 와중에 모든 훈련병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시선도 견뎌야 했다. 물론 화장실에 있는 동안 "집합"이 걸리는 리스크 또한 순전히 본인 몫이다. 
  그래서 항상 훈련병들은 화장실을 가는 일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했다. 작은 일이면 몰라도, 특히나 큰 일이면 정말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손에 쥔 화장지는 의도된 용도(?)보다, 이마의 땀을 닦는데 더 요기났다. 조소가 섞인 조언, 진심이 담긴 조언, 아무 생각 없는 조언 등 주변 훈련병들의 수 많은 조언들이 쓰나미처럼 귓속으로 몰아친다. 머릿 속은 더욱 패닉이 되어간다. 일 중에 "집합"이 걸려서 당황할 모습, "대본"이 틀려서 흘려올 식은땀들, 엄청난 조소와 폭언을 들으며 풀밭으로 뛰어갈 일들, 훈련 도중에 옷에 지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인생에서 손 꼽을 만한 멋진 문장을 들었을 때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같은 내무실의 내 건너편에 있던 훈련병이 바로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우리는 전투복과 전투화를 갖춰신고 내무실 침상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화장지가 서서히 적셔져 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훈련병들은 녀석에게 온갖 정보와 분석을 바탕으로 쓸데없는 조언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바로 내 뒷 번호를 가진,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한 마디 외쳤다. "야,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제일 빠른 때여~". 그 말을 듣고는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서로 그 말을 따라하기 바빴다. 결국 화장지를 들고 있던 녀석은 재빨리 뛰어나갔고, 집합이 되기 전에 무사히 귀환했다. 녀석은 시원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밖에 모르던, 뭔가 솔직한 정겨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녀석의 그 말은 내게 단지 화장실에 가는 것에 관한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삶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두려움에 맞부딪히게 된다. "늦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한 두려움의 대표적인 표상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녀석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이 때"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 중 항상 가장 빠른 시기다. 아무 것도 늦은 것은 없다. 시작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적극성이나 실천성이 유난히도 모자란 나는 요즘도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녀석의 말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이 항상 가장 빠른 시기일 것이라고 말이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그는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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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성 강한 나의 벗들이여, 저 지하에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를 이 뒤늦은 서문에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이 서문 대신에 자칫하면 추도문, 조사가 실릴 뻔 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왔다. 나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나와 같은 모험을 그대들에게 전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달라! 또한 내가 맛본 것과 동일한 고독을 맛보라고 요구한다고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신만의 길을 걷는 자는 누구와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길'을 가는 데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결과이다. 거기에 그를 도우러 오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닥쳐올 위험, 우연, 악의, 악천후, 그 모든 것을 그는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그는 정말 자기의 길을 혼자서 간다. 그래서 그가 이 '혼자서'라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때때로 화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면 친구들조차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 추측할 수 없고 "뭐라고? 어쨌든 그는 가고 있는가? 그에게 아직 길이 있는가?" 이렇게 때때로 서로 묻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고독해진다. 
  그즈음 나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중요한 일을 시도했다. 나는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바닥에다 구멍을 뚫었다. 우리 철학자들이 수천 년동안 가장 확실한 지반이라고 생각한 낡은 '신념'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파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어떤 건축물이라도 지금까지 몇 번이고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다 건축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나는 도덕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파엎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서문 중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곽복록 역, 동서문화사, p.493~494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우리착하고이쁜아들들"



  내게는 아직은 어린 사촌 동생들이 있다. 형제인 녀석들은, 형은 이제 갓 중학생이 되었고,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이다. 형은 숙모님을 빼닮았고, 동생은 숙부님을 빼닮았다. 나와는 나이 차가 있기도 하고, 출생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내가 빼놓지 않고 보아온 녀석들이어서 그런지, 왠지 모를 그런 정감을 주는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아이들을 잘 대할지 모르는 내게도 스스럼이 없다. 그래서 숙부님은 내게 원래 애들이 "성격 더러운 형"을 좋아한다고 놀리곤 했다.

  지난 추석에 잠깐 집에 내려가니 녀석들이 와있었다. 아침 일찍 도착해서 인지 녀석들은 자고 있었다. 숙모님이 내게 인사를 시킨다며 녀석들을 깨웠다. 작은 녀석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형 왔어?" 라는 인사를 건넸고, 큰 녀석은 여전히 자느라 정신없었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작은 녀석은 아침잠이 깨버렸는지 일어난 지 얼마나 안되어 온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녀석은 원래는 큰 녀석의 것이라는 갤럭시 플레이어를 인형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신문을 보고 있자, 이내 녀석은 내 곁에 와서 "형 뭐해?"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쏟아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갤럭시 플레이어와 와이브로 에그를 함께 쓴다며 내게 자랑했다. 내가 감탄하는 시늉을 하며 이것 저것 더 묻자, 녀석은 더욱 신이 나서 그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들레었다. 내가 구경해봐도 되겠냐고 묻자, 녀석은 절대 안 된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내가 신문으로 눈을 돌리자 녀석은 내게 숙부님과 독도여행을 갔던 사진을 보여준다며 손수 내게 건네주고 시연해 주었다. 그리고는 카카오톡을 열어 자신들의 친구가 누구, 누가 있는지를 하나 하나 보여주며 설명해주었다. 녀석의 태연함과 천진함이 부러웠다. 
  큰 녀석이 잠에서 깼는지, 나와 작은 녀석이 있는 곳으로 눈을 비비며 왔다. 녀석은 깨서 일어나자마자 숙부님의 스마트폰을 큰 소리로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님의 스마트폰을 찾은 녀석은 우리 주변의 침대 머리맡에 속옷 만 입은 채로 앉아 스마트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OO는 형이 왔는데 인사도 안하냐?~" 라는 나의 물음에 녀석은 "형 왔어? 나 지금 이거 빨리해야 돼."라고 단답 만하고 말았다. 사춘기가 다가왔는지, 게임에 집중하는지, 녀석은 언제인가 부터 나의 호의를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녀석은 작은 녀석이 내게 해주는 설명에 조금이라도 누락된 부분이 있을까하면, 눈은 여전히 작은 화면에 담아두면서도 곧바로 큰소리로 설명해주곤 했다. 그리고 작은 녀석이 들고 있는 갤럭시 플레이어가 자신의 것이며, 자신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다. 까칠하면서도 나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는 큰 녀석은 마치 사춘기 시절의 나를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동안, 숙부님과 숙모님은 돌아가면서 내가 있는 곳에 들르셨다. 숙부님은 독도 여행 사진을 같이 보며 독도 여행이 얼마나 멋진 것이었는지를 자찬하셨고,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OO는 아직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라며 흐뭇해 하셨다. 내가 게임에 몰두하는 녀석을 보며 그냥 하나 사주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숙부님은 '우리 OO는 사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녀석에게 무언가 큰 선물을 하나 해주어야 겠다.' 라고 다시 한번 흐뭇해 하셨다. 큰 녀석은 숙부님의 말을 복명복창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속옷만 입고, 스마트폰 화면에 담긴 채, DSLR에 쓰이는 어떤 렌즈를 외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작은 녀석은 내게 와이브로 데이터의 양과 속도가 얼마나 되며, 이 걸로 어떤 게임이 가능한 지 내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숙모님이 왔을 때는 더욱 가관이었다. 숙모님은 끊임없이 내게 자신의 아들들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 얼마나 훌륭한지를 묘사했고, 자신의 아들들이 얼마나 훌륭한 외모와 체형을 지녔는지를 끊임없이 자과하셨다. 내가 녀석들이 소아 비만의 위험에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자, 그 칭찬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모델"을 시켜야겠다고 하셨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 걸 보니, 동생들이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숙모님은 "우리 이쁜 아들"이라는 말을 우리 집에 있는 내내 끊임없이 반복해서 쓰셨다. 심지어는 동생들에 대한 호칭도 그렇게 쓰셨다. 아들이 정말 너무 좋으신가보다고 생각했다. 

  가장 멋진 일은 내가 녀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일어났다. 작은 녀석에게 "학교는 재밌어? 요새 무슨 재미있는 일 해봤어?" 라고 묻자, 녀석은 쿨하게 "나는 스키타는 게 너무 좋아." 라는 말을 시작으로 지난 겨울에 스키타러 간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스키를 타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하루 종일 스키만 탔으면 한다며 내게 스키를 타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계속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꼭 스키 선수가 될 거라고 말했다. 선수가 되기가 어렵다면 스키 강사라도 꼭 할 것이라고 되뇌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스키를 타는 흉내를 내며 내게 자신의 꿈을 호방하게 쏟아내는 녀석에게 나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멋진 이야기였다. 녀석은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아니, 녀석이 고작 초등학생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녀석의 너무나도 멋지고 개성 넘치는 꿈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녀석이 부러웠는지, 나도 녀석에게  "OO야, 나중에 꼭 형을 찾아와 임마. 내가 스키 장비를 사다주던, 스키 시즌권을 사다주던 할테니까 임마. 형이 널 위해서 뭐라도 해줄께. 꼭 찾아와라. 두 번 찾아와." 라고 호기를 내어놓았다. 나는 녀석에게 정말로 감동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멋진 일은 바로 다음에 이어졌다. 
  "스키강사는 별로 돈 못벌어." 게임을 하던 큰 녀석이 너무나도 멋지게 작은 녀석의 꿈을 짓밟았다. 작은 녀석은 별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불편했다. 불편함을 감추고 나는 큰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 넌 뭐가 되고 싶어?", "연금 나오는 거.", "왜 그냥 하고 싶은 거 없어?", "어, 몰라 그냥 돈 버는 거.". 숙모님이 들어오신 건 바로 그 때였다. 내가 숙모님께 따지듯이 "숙모, OO는 스키강사가 되고싶데요!" 라고 말하자, 작은 녀석이 혼자 속삭였다. "아, 이런 거 엄마한테 말하면 안되는데...". 내가 다시 "OO(큰 녀석)은 뭐가 되고 싶다는 지 잘 모르겠다는데요?" 라고 말하자, 숙모는 정말, 너무 나도, 진짜로, 정말, 다시 한번 진짜로 너무나도, 말도 안될 정도로 태연한 얼굴로 "아냐~ 우리 착한 아들들은 틀림없이 전문직이나 공무원 같이 월급 착실히 나오고 연금나오는 안정적인 일을 「시킬 거야」. 그렇지?~ 아들들아?~"... "우리 착한 아들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강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참담했다. 이 세계는 이미 내가 사는 세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숙모님은 명문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합격했다는 나의 다른 사촌 동생에게 부탁하여 "우리 착한 아들들"을 데리고 명문대 투어를 했다고 자랑했다. "우리 착한 아들들"은 고작 이제 초등학생, 중학생에 불과하지만, 숙모님은 "우리 착한 아들들"도 반드시 그런 학교에 들어갈 것이라며 강조했다. 나는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실존적으로 자조했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한 내면 탐구가 필요함을 느꼈다. 나는 작은 녀석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숙모님과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갤럭시 플레이어만 쳐다보고 있다는 걸 위안 삼았다. 작은 녀석에게 몰래 이야기했다. "형 꼭 찾아와 임마. 알겠지?".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식사를 하러 거실로 나갔다. 



  녀석들이 여섯살이나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나들이를 나갔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녀석들을 차 안에 두고 문을 닫고 창문으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놀린 적이 있다. 녀석들은 울어버렸고, 나는 당황해서 바로 차 문을 열고 미안하다며 녀석들을 얼렀다. 큰 녀석이 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잘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분명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만약 나한테 칼이 있다면, 이렇게 형의 가슴팍을 퍽퍽 쑤시고 이렇게 돌려서 파내버릴 거야..". 엄청나게 섬뜩한 얘기였다. 나는 놀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고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는 더욱 섬뜩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한가로이 웹서핑을 하고, 녀석들은 내 뒤의 침대에서 마주보고 앉아 무언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 녀석이 작은 녀석에게 사람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는 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심장 쪽을 칼로 찌르면 죽는다거나, 목을 조르면 죽는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컴퓨터를 하다가도 깜짝 놀래 뒤를 돌아보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었고, 녀석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나 숙모님은 "우리 착한 아들들이 절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너가 잘 못 들었겠지."라고 단호하게 단정지으신다. 하기는 지금 생각해도 그런 섬뜩한 이야기를 나 스스로도 믿기 어렵기는 하다. 게다가 동생들이 너무나도 순수한 외모를 지녔기에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개연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 저항없이 현실에 부지런히 적응해나간다는 비합리성이 개인들에게는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으로 보인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중에서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말하고자 하는 것.


  군 복무 시절이었다. 오랜 후임병 시절을 보내고, 몇몇 분대후임병을 거느린 선임병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취침시간에 막 접어들 때, 나는 권위의 맛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는지 자려는 후임병들을 붙잡고 말을 꺼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임병이라고 해도 계급이라는 구조가 존재하는 한, 후임병에게는 틀림없이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불만이 생기는 대로 말해주면 좋겠다. 면전에서의 욕설 사용만 자제한다면 어떠한 이야기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 후임병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알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내가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지, 적어도 우리 분대에서 내게 먼저 다가와 직접적으로 불만을 이야기 한 후임병은 아무도 없다. 

  어떤 공직자와 일을 할 때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매력적인 목소리와 압도적인 외국어 실력으로 굉장한 위압감을 주변에 흩뿌리는 그런 분이었다. 그는 어린 내게 직접, 어떠한 사항이던 불만이 느껴지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 언제든 지적하거나 비판해도 좋다고 말했다. 자신은 열린 마음가짐을 가졌으니, 건설적 비판은 언제나 환영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런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서는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과 수준 이하의 말도 안되는 비판은 삼가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창쾌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 분과 더 이상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나는 그 분께 어떠한 지적이나 비판을 전한 적이 없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그 친구는 지금 월급쟁이가 되었다.


  "A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어느 사람들에게 사기를 쳤다. 그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물론 아무도 A가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A는 사기를 친 것인가, 사기를 치지 않은 것인가?"


  기억도 희미한 어느 늦가을 저녁, 열람실 생활을 공유하던 친구와 저녁을 먹는 내내 물고 늘어졌던 이야기이다. 저녁을 먹고 나와서도 우리는 공부를 뒤로한 채 이야기를 나눴고, 집에 돌아가서도, 다음 날 아침까지도 계속 되었다. 나는 사기가 맞다고 주장했고, 친구는 사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야기의 요지는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간단하다. 친구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사기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그것이 사기라고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피해자가 그걸 사기로 받아들이지 않고(혹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기를 쳤다."라는 객관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무도 모르면 그건 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이야기에서도 A의 사기는 사기를 친 것이 아니다.
  나는 반대의 입장에 섰다. 나의 입장은 더욱 간단했다. 이미 첫 번째 문장에서 "A는 .. 사기를 쳤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피해자가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면 사기를 친것이 아니다." 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미 저 문장이 나타내고 있는 세계관-내가 존재하는 현실세계와는 별개인-에서는 첫 번째 문장에서 이미 객관적으로 규정된 조건이 등장하므로-즉, 이미 저 문장을 읽고 있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 사기의 유무를 알고 있으므로"- 사기를 친 것이 맞다. 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친구와 나는 저 문장에 따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존재하면서 저 세계관에 대해 방관적으로 내다보며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제시된 조건절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는 것이다. 


  앞서 다뤘던 칼 포퍼의 책을 보는 동안 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위에 제시된 저 문장들은 그저 모순이다. 사기를 쳤다는 걸 모른다. 그런데 사기를 쳤다는 걸 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문장을 동일한 차원의 사실 관계 안에서 묶으려 했던 우리의 시도 자체가 어찌보면 무의미하기도 하고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A가 사기를 친 건지, 안 친 건지 모르겠다. 다만 그런 쓸데없는 논쟁을 하면서 헤메일 수 있었던 상상의 그 시절이 그립다. 함께 하던 그 친구는 지금 월급쟁이가 되어 있다. 



"This sentence is false."



수호자는 수호자인가?


  "자, 그러면 자네도 나와 의견이 같은지 어떤지를 보아주게."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목수가 구두를 만들고 제화공이 목수일을 할 경우, 나라에 무엇인가 큰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ㅡ "큰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ㅡ "그러나 본래 노동자이거나 돈벌이계급에 속한 자가 전사계급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든가, 전사가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수호자계급으로 들어간다든가 하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음모는 나라의 멸망을 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ㅡ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ㅡ "그렇다면 국가에는 세 개의 계급이 있는데, 이들 계급 간의 상호변화나 음모는 국가에 대해 큰 죄악이며 또 지극히 사악한 짓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 ㅡ "확실히 그렇습니다." ㅡ "그런데 자신의 국가에 대한 가장 사악한 행위는 부정의라고 자넨 주장할 것이 아닌가?" ㅡ "그렇습니다." ㅡ "그러면 그게 곧 부정의일세. 그리고 우리는 거꾸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네. 국가의 모든 계급이, 즉 돈벌이계급과 보조자 계급과 수호자 계급이 자신의 일에 열중할 경우, 이것이 곧 정의일 것이다." 

  이제 이 논증을 살펴보면 (a) 엄격한 계급제도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국가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회학적 가정, (b)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은 부정의라는 첫 번째 논증의 끓임없는 반복과, (c) 그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이상이 사회적 변화를 저지하는 것이고, 그는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는 그 어떤 것도 '해롭다'고 설명하는 고로, 사회학적 가정 (a)를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변화는 엄격한 계급제도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부정의의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c)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관심사는 (b)로, 플라톤의 논증을 일별해 보면, 그의 사상의 전 추세가 이것은 국가에 해로운가, 많이 해로운가, 아니면 거의 해롭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좌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국가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하고 부정의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단 한 가지 궁극적인 기준만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지 국가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것은 선량하고 덕 있고 정의로우나 무엇이든 그것을 위협하는 것은 나쁘고 사악하고 불의이다.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위는 도덕적이고,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플라톤의 도덕법전은 엄격한 공리주의로, 집단주의자나 정치적 공리주의의 법전이다. 도덕성의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도덕은 다름 아닌 정치적 건강법이다.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I, 이한구 역 p177~178



  요약하자면, 플라톤은 계급이동은 국가 안정에 해를 끼치고, 국가 안정에 해를 끼치는 것이 부정의이므로, 계급이동을 막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칼 포퍼는 이러한 정의론이 "국가의 이익"에만 오로지 결정적인 전체주의적 입장이라고 비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은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라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시도한 위와 같은 논증은 순전히 사변적인 것에 불과한 논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본래",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이 두 가지 표현에 의해서 강조되고, 노동자, 상인, 수호자, 전사 등등의 계급으로 표현된 대상들. 이러한 사전적인 정의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것이 과연 동어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 라던가 "글라우콘"이라던가, "칼 포퍼"라던가 하는 실제적인 조건이 아니라, 위와 같이 "수호자", "상인", "전사" 따위로 표현된 것들은 당연히 표현 그 자체에서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호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수호자"를 떠올리지, "처칠"을 떠올리지 않는다. 플라톤에게서 내내 강조되는 "이데아"의 개념처럼 만큼이나 "수호자"라는 표현에는 이미 "수호"라는 기능을 위한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있다. 따라서 "수호자"가 "상인"의 역할을 한다거나, "상인"이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논증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된다. 여기에 "본래", "그러한 자격도 없으면서" 등의 표현이 덧붙여지면, 더 말할것도 없다. 따라서 플라톤의 논증은 그 자체만을 놓고는 반박할 수 없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계급이 각 계급의 일을 한다." 라는 지극히 사변적이고 동어반복적인 명제는 그것이 명확하게 "정의"를 가리키는 명제인지, 아닌 지-이것이 포퍼가 책에서 다뤘던 내용이다-는 차치하고서라도, 내용 자체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논증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일단은 무조건 "맞는" 얘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종교와 같다. 나처럼 플라톤에 대해 알 수 없는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진리처럼 추앙할 것이고, 그게 아닌 사람들은 "그냥 당연한 말 아닌가." 라며 지나쳐버릴 것이다. 

 
  책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며, 위에서 발췌한 부분의 핵심 내용은 물론 플라톤의 논증에서 드러나는 국가 중심적 정의론, 조금 과장해서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한 칼 포퍼의 비판이다. 잔뜩 인용해놓고 보니, 편린에 집중한 것 같아 멋적다. 어쨌든, 즐겁게 읽고 있다.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자네는 뭐하는 친구인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쉬고 있었다. 바람도 쐴 겸, 글 쓴다는 친구가 있는 시골에 잠깐 내려갔다. 친구가 지내고 있는 곳은 녀석의 후배네 부모님 댁이었다. 나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미리 전해 들었던 친구 녀석의 말 그대로였다. 도착하자마자 앉어 있을 겨를도 없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고추밭에 나섰다. 그렇게 며칠을 거기서 묵었다. 낮에는 일을 했고, 밤에는 친구 녀석이 쓰는 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 곳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 곳의 아무도 내가 무얼하는 사람인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삼촌, 동네 할머님들, 옆집 아저씨, 건넛집 아저씨들.. 모두 내가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무슨 일을 하는 지, 얼마나 돈을 잘버는 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그런 것들 따위를 전혀 묻지 않으셨다. 그저 거기서 나는 "OO의 친구"이자 그저 "젊은 일꾼" 일 뿐이었다. 어머님과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님과 술잔을 비울 때도, 삼촌과 담배연기를 나눌 때도, 그들에게 나는 정말로 그저 눈앞에 서있는 "나" 그대로 일뿐이었다. 
  그들 앞에서 내가 가진 허례와 허물들은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고, 그들 앞에서 나는 오로지 순수한 나 자신만 남았다. 얼마나 멋진 경험인가? 오랜 고난과 번뇌 속에서 그토록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자유로움이 너무나도 쉽게 내게 찾아왔다. 그렇게 그런 젊은 "일꾼"의 일원으로서 나는 다른 "일꾼"들과 노동의 감각을 공유했고, 새참의 미각을 나눴다. 


  우리 아버님께 친구를 소개하면 아버님은 항상 물으신다. "그 친구는 뭐하냐 애냐?", " 그 애는 어디 학교 나왔다냐?". 친구의 세속적 지위나 상황에 따라 가려 사귀라는 그런 천박한 이야기를 하고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아버님께서 묻는 그런 질문들은 그저 이 사회에 상존하는 가장 간단한 스테레오 타입을 통해 그 친구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아버님에게 배운 건지 나 또한 새로운 친구에 대해 들을 때면, 습관적으로 "그 친구는 뭐하는 애냐?" 라고 묻곤 한다. 내가 물은 것이 분명 그 친구가 취미로 나무를 깎는 일을 한다던지,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애라던지, 따위는 아닐 것이다. 단지 녀석의 세속적 지위가 궁금했을 뿐인 거다. 물론 녀석도 나에 관해 똑같이 물을 것이다. 계속 시달려야 한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민감해진다. 항상 어떤 그럴듯한 타이틀을 계속 만들어둬야 한다. 그리고 수십번, 수백번 씩 되내이면서 살아야한다. 그들이 물을 때 마다, 결국 내가 내 자신에게 물을 때마다. 
  그래서 슬프다. 나의 꿈과 비전을 멋들어지게 늘어놓을 만큼 호기롭지도, 성숙하지도 못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 속에 스스로는 계속 작아지고 지쳐간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모든 상대를 살피고 같이 끝어내리고자 한다. 나만 내려 갈 수 없다. 나도 상대들에게 묻는다. 이 모든 건 끝없이 재생산 된다. 슬픔은 계속해서 돌고 돈다. 나와 당신, 모두가 이 슬픈 대기를 만든다.
  도시에서의 느낌은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언제나 남이 무엇을 하는지 신경쓰며 살고, 언제나 남이 나를 어떻게 볼 지 두려워하며 산다. 그런 무거움과 지겨움은 차근차근 짓눌러온다. 벗어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간단치 않다. 자만감도 독이 되고 열등감도 독이 된다. 칭찬도 공격이고, 비난도 공격이다. 서로가 서로를 상처입히면서 살아간다. 


  시골에서의 경험은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볼 수도 있다는 걸 느낀 일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그저 잠시 왔다간 "OO의 친구"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눈 앞에서 직접 마주치고, 부딫히고, 느낀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다지 엮일 일이 없는 외부인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일시적인 느낌이라하더라도, 그 느낌은 정말 진정한 자유의 냄새가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


  잠깐 병원에 들르던 차였다. 글 쓴다며 시골에 내려가 있는 친구가 문득 콩을 베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울컥할 만큼 슬퍼져버렸다는 감상을 내게 전했다. 나는 너무나 태연하게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 라고 시원하게 친구의 감상을 짓눌렀다. 옆에 있었다면 주먹이라도 날아왔을 것 같은 그런 속없는 대답을 듣고도 친구는 그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속 좋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의 시비성 대답의 의도를 녀석은 너무나도 가볍게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석..." 

  사실 난 그 사람을 잘 모른다. 노래도 잘 모른다. 약간만이라도 과거의 취향이 묻어나오는 소주집이라면 여지없이 그의 노래가 지겹도록 흘러나온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것들은 전부 까닭 없이 느려터진 진부한 노래들일 뿐이다. 그가 기타를 친다는 사실도, 그가 가사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그가 가진 깊은 호소력도, 무식한 내게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불과했다. 난 그의 아름다움을 잘 모른다.
  
  그의 노래 중의 하나 처럼, 나이가 "서른 즈음에" 다가와서인지, 그의 감성을 노래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을 걸어놓는 친구들이 늘었고, 그의 노래에 감상 젖은 극찬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나의 "그래?" 라는 무식한 표정은 어느 덧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술에 닿은 그들은 그의 노래를 말 그대로 병신처럼 흐느꼈고, 그다지 사이가 좋을 것도 없는 친구들 끼리도 서로 "그의 감성"을 이해한다며 의기를 다지기도 했다. 그의 감성에 무지한 내게는 그저 웃기는 꼬락서니에 불과했다. 지들이 뭘 했다고...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인지는 수많은 글들이 나타내어주고 있다. 내가 아무리 그의 감성에 무식하다지만 그를 폄하하거나 비난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감성을 읊조리는 나부랭이" 들이다. 그가 가객으로써의 삶을 지낼 때, 고작 태어나기나 했을지도 모를 나부랭이들이 어느 날인가 부터 갑자기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을 흉내 내는 바로 그 꼬락서니가 우스울 뿐이다. 

  그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한다고 달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저 그가 대변했다는 "소시민적 감성"을 멋들어지게 허세부리는 어린애들만 보인다. 그와 같은 시대를 숨 쉬었던 386세대들의 감상은 감상이라고 해두겠지만, 그가 살았던 대기의 명암과 냄새에 마저 가까이가 볼 생각도 못했을 어린애들이 자신들의 시답지 않은 일상적 번민에 섞어 말하는 감상은 감상으로 받아주기에는 조소가 앞선다. 

  "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김광석 노래가 별로다"라고 말했던 나의 대답은 친구를 향한 조소였고, 극적인 어그로였다. 이미 비슷한 공격을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친구는 가볍게 넘겼다. 녀석은 내게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이미 내가 누구들을 겨냥하며 말했을 지가 확 떠올라서, 가만히 넘겼다고 했다. 공격이 간파당한 나로서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나는 김광석, 그의 음악이 부족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거나, 애처롭다거나 비난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비록 아쉽게도 나는 그의 감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와 그의 음악이 어떤 것이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정도는 인식할 수 있다. 내가 한심하게 보는 것은 갑작스레 나이를 처먹었다고 그의 감성에 눈물지으며 깝죽대는 친구들이다.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몰입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가? 과연 그들이 그의 노래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대하고 있으며, 진정으로 고상한 가치를 향해 숙고하고 있는가? 최소한 내가 볼 때 그들은 아니다. 

  「결핍될수록, 그것에 몰입한다. 겉으로.」 오늘도 나는 그들이 역겹다고 한 번 더 생각한다. 마치 예수는 사랑하지만, 예수를 노래하는 소시민들은 역겨운 것처럼.